[문명훈의 뷰 포인트⑥] 시험 밖의 지식

  • 등록 2021.05.25 18: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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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가끔 강의에서 적절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 한참 헤매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황에 맞는 단어를 내뱉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맴도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겁니다. 특정 낱말이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이 하얘져 하려던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거죠. 불완전한 기억 때문에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설단 현상(Tip-of-the-tongue Phenomenon)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토론식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보게 됩니다. 어렴풋이 아는 내용을 말하려다 보니 말이 꼬이고 분명 알고 있는 것 같은 단어임에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억의 저장과 인출

 

기억 저장이나 기억 인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경우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데요. 기억에는 크게 세 가지 과정이 포함됩니다. 경험하고 생각한 내용을 기억으로 바꾸는 부호화(enconding), 부호화된 정보를 유지하는 저장(storage), 부호화된 정보를 떠올리는 인출(retrieval)입니다.

 

인간의 기본 감정을 다룬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기억의 저장 과정이 나옵니다. 어떤 경험은 금방 잊혀지고, 어떤 경험은 깊은 인상을 남겨 핵심 기억이 됩니다. 강력한 자극이나 반복적인 경험은 장기 기억(long-term memory)으로 남습니다. 그런 기억들은 다시 인출되기도 하고, 기억 매립지(‘기쁨이’와 ‘빙봉’이 떨어진 곳)에 버려져 잊혀지기도 합니다.

 

일상에서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이 자연스러워 부호화나 저장, 인출에 대해 생각할 일이 없지만 외국어를 공부하면 그 과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영어 공부가 정말 싫었습니다. 단어 외우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외국어를 공부하려면 기억해야 할 단어도 많고 그 단어들을 한 번 암기한다고 계속 머릿속에 남는 것도 아닙니다. 반복해서 눈에 익혀야 문장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단어 암기를 힘들어하는 학생이 많아 어떤 선생님은 단어를 연상할 수 있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 단어 중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낱말이 courage(용기)입니다. 영어 선생님 섬함이 ‘정용기’였는데 "자기처럼 꼬라지 부리는 사람이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하시더라구요. 말도 안 되는 설명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전히 courage 하면 가장 먼저 그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런 유형의 선생님을 한 번쯤은 만나보셨을 겁니다. 영어 선생님께서 단어를 이렇게 알려준 이유는 맥락과 설명이 있을 때 기억이 더 잘 나기 때문입니다. 부호화와 저장, 인출을 돕는 거죠. 이 과정이 원활할 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중고등학교 공부는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것입니다. 수능을 잘 보고, 좋은 내신 성적을 얻어 명망있는 대학에 들어가려는 것이죠. 영어 단어와 문법을 외워 영어 지문을 이해하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 공부의 1차적 목적인 셈입니다. 대학 진학이 달린 문제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공부도 주어진 보기에서 답을 고를 수 있는 수준으로 하게 됩니다.

 

시험 중심 교육이 많은 비판을 받지만 사실 시험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입니다. 여러 가지 학습법 중 지식을 습득하는 데 시험만큼 큰 효과를 내는 방식은 많지 않습니다. 시험은 기억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학생이 학습 과정에 더 집중하도록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시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경쟁 과열 같은 부작용 때문이지 시험이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지 지식을 쌓아서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시험은 학습을 보조하고 평가하기 위한 수단이지 교육의 궁극적 목표가 아닙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더 이상 시험 성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을 활용하도록 요구받습니다. 궁극적으로 교육은 학습자가 배운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활용할 줄 알아야 지식이다

 

시험이 아닌 지식의 활용을 목표로 한다면 공부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지식을 저장하고 인출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학교 시험에서는 주어진 문제를 풀면 되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시험이 따로 없습니다. 사회에서는 문제가 없는 문제(정의되지 않은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나름의 답을 찾아야 합니다. 정의되지 않은 문제는 단편적인 개념 이해와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사업을 하기로 마음 먹고 특정 제품을 개발해 출시하려면 기술을 개발한 후 시장을 파악하고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소비자 심리, 가격 동향, 경쟁 제품과의 차별점, 유통망, 수익성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살펴봐야죠. 시험과 다르게 정확한 문제 제시도 주어진 보기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상황에 맞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 경험상 학생들은 지식을 받아들이는 수업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는 수업은 어려워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생산하는 것이 훨씬 더 고난도의 작업이니까요. 시험(학교)이라는 틀 밖에서 지식을 활용하는 일은 땅을 걷다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헤엄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부유물을 끌어안은 채 표류하게 됩니다.

 

몇 년 사이 학교에서 비교과 과정의 비중이 늘었습니다. 시험 중심의 교육이 한계를 갖고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겠죠. 지식이 없으면 지식을 활용하기도 어려우니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도 필요하지만 앞으로는 습득한 정보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수업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문명훈 moondroi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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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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