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싶은 동기부여가 될 만큼만 읽다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면 그만 읽고 바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동진 평론가처럼 스포를 확인해도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되지 않는 타입이라면 그냥 읽어도 상관없다.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오랜만에 걸작을 만났다. 비슷한 시기 너무나 기대했던 <베테랑2>를 보고 메시지 과잉 영화라는 실망감이 들었는데 <대도시의 사랑법>은 메시지를 떠먹이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기만 한다. 그러면서 유머와 재미를 잃지 않는 분위기를 유지한다. 원작 소설을 집필한 박상영 작가는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을 처음부터 구상을 해놨었고 대도시라는 키워드가 나한테는 가장 중요했다”고 말했다.
왜냐면 소설 속에서 소수자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그들에게 대도시라는 공간이 중요하다. 쉽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익명이 되기 좋기 때문에 공간적인 대도시의 의미가 중요했고, 인간이 너무 외로워지는 공간이 또 대도시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서 고독을 느끼기 좋은 공간이 대도시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제목을 지었다.
그렇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장흥수(노상현 배우)는 소수자성을 갖고 있다. 남성 동성애자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영화 초반부터 바로 공개된다. 또 다른 주인공 구재희(김고은 배우)는 여성 이성애자이지만 자기 색깔이 강하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 잘 놀고, 클럽에 많이 가고, 짧은 연애를 자주 하고, 하룻밤 사랑도 즐긴다. 하지만 “걸레”라는 말이 함축하는 공격성에 매번 직면하게 된다.
재희는 겉으론 센 척하며 부당한 시선과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는 스타일이다. 이를테면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재희의 가슴 노출 사진이 조리돌림과 함께 단톡방에 돌아다녔는데, 재희는 시험을 치는 강의실에서 가슴을 까보이며 자신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욕을 하고 나와버리는 똘끼를 시전한다.
시대적 배경은 걸그룹 ‘미스에이’가 갓 데뷔해서 <bad girl good girl>을 발표했던 2010년인데 이 곡이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노랫말에 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를 잘 알지도 못 하면서 내 겉모습만 보면서 한심한 여자로 보는 너의 시선이 난 너무나 웃겨.
재희는 인스턴트 사랑을 하지 않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남자친구 선우(이유진 배우)를 만났지만 그는 바람을 피고 있었다. 수면 위에선 공식 여자친구와 지내고, 수면 아래에선 소위 “노는 여자”와 다름 없는 재희와 바람을 피고 있었는데 이중행각이 들통나자 재희에게 온갖 모욕적인 말을 쏟아낸다. 사람들이 많은 공개적인 장소. 재희는 굳이 선우에게 “나같은 여자”는 어떤 여자냐면서 빙빙 돌리지 말고 말을 해달라고 다그친다. 선우는 디스 랩을 하듯 모진 말을 뱉고 말았다. 재희는 정말 사랑했던 만큼 깊은 상처를 받았다. 결국 시간이 흘러 재희는 흥수 앞에서 눈물 범벅으로 하소연을 한다.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한이 되어 가슴을 콕콕 찌른다. 왜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 하면서 함부로 재단하고 모욕해도 된다고 여기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 걸레 같은 년? 왜 사람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함부로 말하고 혐오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재희는 우연히 이태원에서 흥수가 남성 파트너와 격한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흥수는 인터넷으로 고통 받지 않고 자살하는 법을 검색해보고, 이민하는 법도 알아본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1급 비밀로 감추고 싶었는데 누군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희는 흥수를 편견 없이 대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다. 격려와 응원을 해줬다.
니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면 열등하다고 생각해. 다 좆같애.
대학에서 공인된 아웃사이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소울메이트가 됐다. 자연스럽게 동거로 이어졌는데 절친끼리 동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남녀가 비이성관계로 동거한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겠지만, 좀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정말로 흥수와 재희는 그저 친한 친구일 뿐이다.
베프랑 그냥 살 수 있잖아요! 서울에서 방세가 얼마나 비싼데! 우리가 이상해? 아니 전혀!
흥수는 일찌감치 본인의 성 정체성을 알아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엄마(장혜진 배우)의 반응을 보고 철저히 감추기로 맘먹었다. 엄마는 자기 아들이 남성과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교회에 다니며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다름 없었다.
흥수야 나는 니 병 나을줄 알았어.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내가 게이라고 고백해본 적 없는 흥수. 재희에겐 말해준 게 아니라 들켜버린 것이다. 그런 흥수는 또 새벽에 아들 방에 몰래 들어와서 새벽기도를 하며 “병이 낫게 해달라...”고 읊조리는 엄마에게 넌지시 커밍아웃을 했다.
엄마 나 게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야.
엄마는 어안이 벙벙해졌는지 바로 집 밖으로 나갔다. 흥수는 사랑하는 엄마가 혹시라도 잘못된 선택이라도 할까봐 걱정스러운데, 엄마는 성소수자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들어와서, 집에서 혼술을 진하게 하며 속타는 마음을 달랬다. 사실 엄마도 흥수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동안 알게 모르게 노력하고 있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데이트 폭력, 성소수자 혐오, 대학 커뮤니티에서 만연한 성범죄 등을 정면으로 조명하는 영화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베테랑2>처럼 메시지에 집착해서 극의 전개를 부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 영화가 아니다. 그저 재희와 흥수가 13년간 우정을 이어나가며 세상의 풍파를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보여주기만 한다. 시종일관 유머와 재미를 추구하되, 재희와 흥수가 매번 맞닥뜨리는 편견의 벽은 진지하게 묘사된다. 물론 심각한 장면에서도 웃음 포인트를 심어놨다. 메가폰을 잡은 이언희 감독이 설계해놓은 장면과 서사에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곱씹어보게 되는데 그 과정이 그리 난해하지 않다. 21살부터 33살까지.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재희와 흥수는 조금씩 성숙해져간다. 사회가 정한 틀에 자신을 껴맞추기 위해 취업도 하고 군 입대도 결정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의 전부를 채우진 않는다.
재희의 결혼식에서 흥수는 속으로 “내가 나인 채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려준 재희야 잘 가라”
고 말하는데 이 대목이 바로 이언희 감독의 핵심 주제의식이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사람 어떻게 보면 판타지일 수 있지만 그런 존재로 보이는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