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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 이 땅엔 ‘노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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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김가진의 이모저모] 9번째 칼럼입니다. 김가진씨는 더불어민주당 당원이자 세종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 20대 청년입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정당 활동을 해왔으며, 더불어민주당 청소년당원협의체 ‘더새파란’ 초대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김가진 칼럼니스트] 신분제가 부당하다는 사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확언할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이후로 신분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개한 제도가 되었으며, 강력한 독재자가 나타나 사회를 다시 신분 질서 속에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 고려해봐야 할만한 사실은 먼 나라 얘기일 것 같은 신분제가 고작 130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가까운 조상 역시 누군가를 소유했거나 누군가에 의해 소유되었다. 신분제는 고조선부터 조선 후기 갑오개혁으로 폐지되기 이전까지 무궁한 역사를 이어왔다. 갑오개혁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추진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신분제적 잔재가 오랫동안 남아있었을 것이다. 역사를 전공한 중앙일보 유성운 기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사실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한 나라입니다.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사례와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또, 15세기 이전에 노비가 사라진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유별난 사례입니다. 물론 다른 민족을 노비로 두면 이보다 낫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높은 문명 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이 현대를 목전에 둔 19세기까지 이런 제도를 유지했다는 점은 분명 의외의 대목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도 노비가 있긴 했습니다만 중국의 경우엔 송나라 때 법으로 철폐됐고, 일본도 전국시대를 거치며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이후에도 노비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채무 관계라든지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적인 영역에 속했고, 국가 차원에서 노비제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노비 이름은 일부러 천하게 지었다고 한다. 노비들의 이름이 멸칭에 가까운 것은 양인과 노비를 구분하기 위한 의도였다. 노예제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은 동족이나 이웃 부족을 노예로 삼을 때에 발생한다. 조선의 노비제는 긴 세월 같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온 멀쩡한 이웃들을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천민으로 전락시킨 부조리한 제도였다. 그러한 부조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지배층과 양반들은 노비를 마치 자신들과 다른 존재인 것마냥 천한 이름을 지어주고 반복 호명해서 자신의 위치를 각인했으며 노비들을 세뇌했다. 노비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어떠한 곳에서도 보호받지 못 하고 평생 천대를 당하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이전 무수한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이 신분제라는 구실 아래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착취했거나 누군가에 의해 착취당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폭력 행위에 죽어 나간 죄 없는 노비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평등과 자유를 원없이 누리고 있는 우리 후손들이 지켜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의 폐단을 바르게 볼줄 알아야 하며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정확하고 면밀히 살펴서 비슷한 일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체제가 사회 질서 속에서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러지 못 했던 시대에 살았던 누군가가 우리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기꺼이 바친 목숨의 덕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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