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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부인> 쵸쵸상 “어리석은 여인이지만 가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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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김가진의 이모저모] 13번째 칼럼입니다. 김가진씨는 더불어민주당 당원이자 세종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 20대 청년입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정당 활동을 해왔으며, 더불어민주당 청소년당원협의체 ‘더새파란’ 초대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김가진 칼럼니스트] 오페라 <나비부인>은 극이 진행될수록 분위기 전환과 반전의 묘미가 있는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비부인>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난해하고 복잡하다. 미국인 남편(핑커튼)에게 교태를 부리는 고작 15세 갓 퇴기(기생 일을 하던 여성이 일을 관둠)한 게이샤를 연기해야 하는 1막의 소프라노가 2막의 끝에서는 절망으로 치닫는 과정이 간단할 수가 없다. 여주인공 쵸쵸상이 가진 부푼 희망은 이내 내리막길로 추락하고 만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비련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쵸쵸상의 비극을 종결짓는 자결은 극중 그 어떤 장면보다도 강렬하고 격정적인 목소리로 연기를 해야만 한다. 그런 연기 역량은 자기 음색에 맞는 레퍼토리를 갖고 있는 보통의 소프라노들이 쉽사리 갖추기 어려운 재능이다.

 

쵸쵸상은 떠나버린 미국인 남편을 늘 그리워하며 돌아오리라 믿는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는 시나리오를 스스로 상상하며 흡족해한다. 이는 <나비부인> 속에서 유명한 아리아 Un bel di vedremo(어떤 개인 날)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다른 약혼자(케이트)를 데리고 왔을 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남편을 기다리며 버텨온 나날들. 그 속에서 점차 변화해간 애착, 갈망, 희망, 집착 등의 정서적 고뇌는 남편의 배신으로 모조리 부정당한다. 한 마디로 세상에 버려진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유럽 대륙에는 ‘Japonary’라는 일본 문화 열풍이 불었고, 일본을 모티브로 삼은 여러 작품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 바 있다. 비록 <나비부인>을 모티브 삼은 작품은 없으나 우키요에(에도 시대의 풍속화) 작가 가와나베 교사이의 작품 <미인도>는 쵸쵸상을 연상시키에 충분하다. <미인도> 속 화려한 치장을 한 여인처럼 쵸쵸상은 공허한 기다림의 세월이 의미없는 최후가 될지도 모르고 자신을 꾸미기 바쁘다. 그녀의 안타까운 마지막은 ‘스스로의 환상에 갇힌 슬픈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마치 환각제에 취한 듯 자신의 시나리오에서 빗겨간 순간을 알고 있음에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긍정적인 미래만을 상상했다. 무지이자 자기합리화가 맞다. 그러나 그녀는 비극적인 인생에서 유일한 망상의 도피처에 필연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마저 없으면 삶의 목적도, 방향도, 원동력도 잃어버렸을 것이다. 하루하루를 버텨낸 그녀. 무지하지만 참으로 가련하지 않은가.

쵸쵸상은 1막에서 남편에게 “미국에는 나비를 핀으로 꽂아 박제하는 문화가 있다면서요?”라며 자신이 핀에 찔린 것처럼 연기를 했고 교태를 부린렸다. 복선이다. 그녀는 미국인에게 핀에 꽂힌 나비 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존재였지만 그것을 모른채 아양을 부렸다. 결국 핀에 꽂히는 연기를 했던 것처럼 자결로 생을 마감한 그녀의 심정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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