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문명훈 칼럼니스트] ‘내 인생은 내 의지대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격언이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은 상황의 영향을 꽤 많이 받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긴 ‘코로나 블루(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우울과 무기력)’만 봐도 삶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관계가 단절되고 일상이 무너지면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쉽게 우울과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은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프리랜서 인문학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저 역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업이 줄고, 일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간헐적으로 우울감과 무기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 속에서 자아 실현을 찾는 제게 코로나 팬데믹은 꽤 힘든 상황입니다. 인간은 관계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찾기에 친구들과 자주 만나지 못 하는 상황도 우울과 무기력에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3~4개월만 있으면 풀리겠거니 생각했던 코로나 시국이 1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합니다.
관계 형성과 직업적 성취는 자아실현과 존중감을 느끼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관계가 단절되고 직업적 성취가 무너지면 개인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은퇴 후 우울증이 찾아오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간 쌓았던 네트워크와 업무에서 단절되는 경험은 불안과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불안의 사이클은 저뿐만이 아니라 지난 1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겪은 정서적 증상입니다. 몇 년이 지나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IMF 외환위기나 세월호 침몰 사고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트라우마를 남길 것 같습니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는 사회적 분위기가 침체됩니다. 역동성도 잃게 됩니다.
무기력한 상황에 대응하는 심리적 수단
의지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대응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우울과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면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환경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개인은 상황 판단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적 수단을 이용해 긍정적 자아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심리 수단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힘든 건 아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다."
지난 1년여간 우리 모두는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고 저 역시 비슷한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가끔 토요일 저녁 본가에 가면 부모님은 KBS 〈동행〉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접하고 어머니는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 가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불평할 처지가 못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비교는 긍정적 자아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대응 방식은 어려운 상황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3월말 현재에도 하루에 300~500명씩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유흥업소 이용이나 종교시설의 방역수칙 위반처럼 부적절한 처신 때문에 확진자가 발생한다면 비난받을만 하지만 방역 지침을 지켰다면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직장과 가정 내 감염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때 감염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확률과 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확진자가 발생하면 책임을 묻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비난하게 됩니다. 전염되지 않더라도 자가 격리나 시설 폐쇄와 같은 손해가 발생합니다. 그런 손해를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라고 생각하면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무기력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탓하게 됩니다.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적 요인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경향을 심리학에서는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합니다. 날씨 때문에 망친 친구들과의 여행을, 계획을 세운 친구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앞선 사례들 모두 심리적 왜곡을 통해 안정감을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위기에 처한 집단의 반응
이러한 대응 방식은 개인 뿐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나타납니다. K-방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바이러스 확산을 제어하지 못 하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서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습니다. 동시에 외국인에 대한 혐오도 커집니다. 외국인 교수를 보고 난민이냐며 조롱하는 학생, 지하철에서 마주친 외국인에게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공격하는 사람에 대한 뉴스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외국인에 대한 비난과 모욕으로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감염병의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그저 가짜 원인을 설정하고 공격하면서 현실을 통제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경향성은 집단 고정관념과 결합하면 훨씬 더 파괴적입니다. 예컨대 애틀란타 총격 사건은 오랫동안 쌓였던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표면화된 사건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미국인이 아시아인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활성화시킨 트리거가 되었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집단주의 사고가 힘을 얻어 아시아계 시민에 대한 차별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같은 아시아계라도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다르고, 한국인 내에서도 개인별로 차이가 있고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그 차이가 무시되고 뭉뚱그려져 ‘아시아인’이라는 명칭으로 규정됩니다.
집단을 구분하고 고정관념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 성향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도 이유는 있습니다. 첫 번째로 집단적 사고는 인지적 부담을 줄여줍니다. 인간의 뇌가 어머어마한 정보량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의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뇌는 중요도를 설정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3일 전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 직원들과 자주 가는 백반집에서 먹었겠거니 추측하는 정도가 일반적입니다. 인간의 뇌가 이렇게 작동하는 이유는 사소한 인식을 포기하면 인지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에게 주목하지 않고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아시아인 같은 집단적 특성에 주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종 범주를 구분해 ‘아시아인의 특성’이라는 ‘전형(stereotype)’을 만들면 인지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주의력도 일종의 자원이기에 한 군데서 아끼면 그만큼 다른 곳에 주의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집단 구분과 고정관념이 갖는 두 번째 장점은 소속감과 안정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애착을 갖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실질적인 혜택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기업이 성과급을 주는 이유도 그런 동기부여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업무에 충실해서 기업이 성과를 내면 개인에게도 이득입니다. 아이돌 그룹 멤버 개인의 인지도가 부족하더라도 팀의 인기가 높아지면 개인에게 주어질 기회가 더 많아집니다. 당장 주목받지 않더라도 열심히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가시적인 혜택이 없음에도 소속 집단에 대한 선호가 나타납니다. 평소에는 별 생각 없다가도 국가 대항전이 있는 날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불현듯 튀어나옵니다.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둔다고 해서 개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기분만 좋을 뿐이죠. 이럴 때는 집단 구분이 다른 역할을 합니다. 나에게 돈 한 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집단이 자존감 향상과 자아실현에 도움이 된다면 실질적 혜택이 없음에도 집단에 소속되려는 경향성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자 헨리 타이펠(Henri Tajfel)은 실험을 통해 집단에 소속되려는 욕구를 잘 보여줍니다. 임의적으로 집단을 구분하고 실험 참가자에게 보상과 벌칙을 배분할 권한을 줬을 때 참가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더 많은 보상을 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Henri Tajfel, 1971) 아무 의미가 없는 구분인데도 집단을 구분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 구성원에게 유리한 분배를 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내집단 편향(ingroup bias)'이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분노와 공격성의 전염
분명 집단적 사고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언론을 통해 확인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큰 해악을 만들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부상하는 인종주의적 사고가 대표적입니다. 개인이 비교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비난의 대상을 찾아 심리적 안정을 얻는 것처럼 집단도 집단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확인하고 외부 집단을 적대합니다. 이런 태도가 편견과 차별로 이어집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게으르고 지능이 낮다거나, 아시아계 미국인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식의 생각은 일반적인 편견입니다. 이런 편견이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차별과 폭력은 다시 편견을 고착화하는 갈등 구조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미국의 인종 갈등에서 볼 수 있는 비백인계 시민들에 대한 근거없는 편견은 우월감과 공격성 표출로 이어지고 결국 사회적 결속과 공공선을 파괴합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닌 집단 갈등과 편견에 주목하는 이유는 사회적 위기가 분노와 공격성을 증폭시키는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경기침 체와 난민 유입은 유럽 극우 세력의 성장에 영향을 줬고, 러스트 벨트(미국 북동부 5대호 주변에 형성된 제조업 중심지)의 붕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과 인종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코로나 팬데믹도 곳곳에서 화약고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한계 상황에 다다른 사람들이 적개심과 공격성을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는 한국에서도 나타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성 때문에 외국인 혐오가 확산되고 편가르기적 심리가 격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습니다. 최근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2회 만에 폐지됐습니다. 사극이라면 늘 역사 왜곡 논란을 겪게 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면 폐지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구마사>에서 논란이 된 것들이 간단치 않더라도 과거 다른 사극들에서 나타난 문제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소품으로 등장한 음식과 건물 양식 때문에 방송이 사라지고 PD와 작가, 심지어 출연진이 매국노로 매도되고 공격받는 상황은 분명 비합리적입니다. 중국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확장되고 전이되어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이외에도 지역과 종교, 성별, 직업 등을 기준으로 증오가 쌓이고, 정치인, 연예인, 일반인 가릴 것 없이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1년 넘게 지속되면서 쌓인 부정적 정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이런 부정적 정서는 쉽게 전염됩니다.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분노와 공격성의 확산이 더 위험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집단 의식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합니다. 긍정적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자연스럽다고 해서 무작정 좋은 것도 아니고, 허용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나친 적대감과 공격성은 사회를 양극화하고 공공선을 파괴합니다. 아무 의미없는 비생산적인 논쟁을 반복함으로써 공동체의 에너지를 소모시켜 버립니다. 개인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고 집단적 차원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 감정과 공격성을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