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수원지방법원 제1-2형사부 소속 권기만 부장판사가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측에서는 윤창호법으로 공소장 변경을 원하시지만 그냥 술 마셨다고 해서 위험운전이 되는 게 아니다. 변호인도 잘 아시지 않은가.”
권 판사의 말처럼 현재 한국 사법체계에서 음주운전을 해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만들어도 윤창호법(특정범죄가중처벌법 5조의11 1항 위험운전 치상 또는 치사)으로 의율되지 않을 수도 있다. 법조문에 보면 “음주 또는 약물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라고 명시돼 있는데 여기에 해당돼야 윤창호법으로 처벌받는다. 만약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로 인정되지 않으면 교특법상(교통사고처리특례법) 치상과 치사가 적용된다. 윤창호법의 양형은 치상 징역 1~15년, 치사 징역 3년~무기징역이다. 교특법은 일괄적으로 5년 이하의 금고다.
로펌들은 음주운전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윤창호법과 교특법의 양형 차이를 부각하며 영업에 나서고 있다.
지난 17일 오전 11시20분 수원지법 201호 법정에서 음주운전 범죄자 20대 남성 손모씨에 대한 항소심 첫 재판이 열렸다. 앞서 6월17일 개최된 1심 선고공판에서 손씨는 교특법상 치상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헬스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던 손씨는 작년 11월10일 새벽 5시20분경 술에 취한채로 오토바이를 몰다 경기도 용인 수지구 죽전패션타운 앞에서 40대 여성 안선희씨를 들이받았다. 선희씨는 목숨을 건졌지만 현재 사지마비, 인지저하, 언어장애, 연하곤란(음식물을 삼키기 어려운 증상) 등을 앓고 있으며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간병인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다.
손씨는 △무면허 △신호위반 △횡단보도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 등을 자행했다. 혈중알콜농도는 0.083%(면허취소 수준 이상)로 만취상태였다. 손씨는 원동기면허와 자동차면허 둘 다 없었다. 음주운전을 해서 면허가 취소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취득하지 않은 상태였다. 위험천만한 오토바이 운전을 감행한 셈이다.
그러나 경찰은 윤창호법이 아닌 교특법을 적용했고 검찰도 그대로 기소했다.
2심으로 가게 된 이유는 검찰과 손씨의 변호인 양측이 “양형부당”으로 항소했기 때문이다. 1심에서 드러난 사실관계는 변동이 없다. 새로운 증거들도 아직까진 없다.
손씨측 변호인은 “양형부당도 말씀드렸지만 항소심 과정에서 합의 노력을 하겠다는 취지로 항소를 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선희씨를 대리하고 있는 문아라 변호사(법무법인 대율)와 동생 안승희씨는 공소장 변경을 요청하기 위해 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에 따르면 항소심 공판을 맡고 있는 수원지방검찰청 이동우 검사는 공소장 변경 요청에 대해 동조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전화상으로도 “공소장을 변경하겠다”고 발언했다. 형사소송법 298조 1항에 따르면 “검사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공소장에 기재한 공소사실 또는 적용법조의 추가, 철회 또는 변경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판사는 검사의 공식 요청을 받고 “공소사실의 동일성을 해하지 아니하는 한도에서 (공소장의 변경을) 허가”해야 한다. 이 검사는 항소심 재판부에 공소장 변경을 탄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아직 요청서를 내지는 않았다.
문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단순한 과실에 의한 사고가 절대 아니”라며 “(손씨의) 위법성이 굉장히 심각하고 중대하다. 음주운전의 영향으로 도로교통법을 적극적으로 어겼고 보행자 신호에 과속하여 질주하는 모습이 CCTV 영상으로 확인됐다”고 역설했다.
이어 “저기 앉아있는 피고인 손씨는 그동안 피해자를 찾아와서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반성의 태도도 없다. 또한 피해 보상의 능력이 안 된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오로지 본인 형량 낮추기에만 열중하고 있는데 이러한 피고인에게 단순 과실에 의한 교특법상 치상으로 의율하여 낮은 형량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사건 이후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손씨는 감옥에서 월 1회 반성문을 써서 재판부에 제출하고 있지만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단 1장도 전달하지 않았다.
문 변호사는 대만 유학생 故 쩡이린씨 사건(관련 기사)을 거론했다. 쩡씨의 목숨을 앗아간 50대 남성 김모씨의 혈중알콜농도는 0.079%였음에도 윤창호법으로 강력하게 처벌됐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문 변호사는 “(김씨가 윤창호법으로 무거운 처벌을 받았던 것처럼) 이번 사건에도 윤창호법이 적용될 수 있도록 공소장 변경을 허가해서 피고인의 범죄에 맞도록 엄벌하고 일벌백계해서 음주운전자들에게 사회적 경종을 울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권 판사는 “내가 변호사와 여기서 논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공소장 변경을 할 수는 있다. 근데 증거가 있어야 한다”면서 “술에 취해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라는 것이 입증돼야 한다. 그래서 모르겠다. 검사와 상의를 잘 해보시고 내가 아니라 검사가 공소장 변경을 결정하는 것이니까. 잘 해보시라. 검사도 피해자측과 의견 조율을 잘 해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CCTV 영상에는 선희씨가 멀리서 보였음에도 손씨가 그대로 가속하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권 판사는 그것만으로는 손씨가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였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비단 선희씨 사례만이 아니다. 실제로 술이 세면 윤창호법을 피해갈 수 있다. 혈중알콜농도가 0.08% 이상이라고 해도 윤창호법이 아닌 교특법으로 빠져나갈 수 있고, 반대로 0.08% 이하라고 해도 윤창호법이 적용될 수 있다. 도대체 기준이 뭘까?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알콜이 사람에 미치는 영향은 사람에 따라 다르므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 해당되는지 여부는 구체적인 교통사고에 관하여 운전자의 주취 정도 뿐만 아니라 알코올 냄새, 말할 때 혀가 꼬부라졌는지 여부, 똑바로 걸을 수 있는지 여부, 교통사고 전후의 행태 등과 같은 운전자의 상태 및 교통사고의 발생 경위, 교통상황에 대한 주의력·반응속도·운동능력이 저하된 정도, 자동차 운전장치의 조작을 제대로 조절했는지 여부 등을 종합해서 판단해야 한다(헌법재판소 2009. 5. 28. 선고 2008 헌가 11 전원재판부 결정 참조).”
사실상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교통사고 전문 정경일 변호사(법무법인 엘엔엘)는 현장에 출동한 담당 수사관의 최초 기록이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면서 “매우 주관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승희씨는 국회와 수원지법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윤창호법에 대해 “고무줄 적용”이라고 비판했다.
용인서부경찰서 경비교통과는 사건 당시 손씨의 상태(관련 기사)에 대해 “사실 음주 수치가 0.15%나 0.2%가 나와도 멀쩡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가해자의) 걸음걸이라든지 혈색, 당시 진술한 내용이 어느 정도 또렷했다. 완전히 정신없을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경찰의 최초 판단이 중요할텐데 손씨는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까지는 아니었던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정 변호사는 23일 오전 평범한미디어와의 통화에서 “아무래도 판사는 질주하는 CCTV 영상과 음주 수치만으로는 공소장 변경을 해주지 않을 것 같다”며 “최초 수사관이 기록한 가해자의 음주 상태로 판가름이 날 것이다. 만약 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윤창호법 적용이 검토되지 않았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평범한미디어는 23일 저녁 즈음 용인서부서 담당 수사관 A씨와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선희씨 가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손씨는 그 당시 술에 취해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라고 볼 수 없는 정황들이 많았다. A씨에 따르면 손씨는 “그때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진술서도 또렷이 잘 썼고, 진술도 다 했다”고 한다. 용인서부서 경비교통과는 결재 라인에 따라 이 사건을 면밀히 검토했고 최대한 피해자 입장에 서서 손씨를 강력히 처벌하기 위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게 A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손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정녕 윤창호법으로 공소장을 변경하는 길은 물건너 간 것일까.
물론 최초에는 곤란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검사의 공식 재검토 요청에 따라 다시 판정을 내려볼 여지도 있을 것 같다. A씨가 들려준 손씨의 음주 상태는 손씨에게 유리한 것들로만 가득차 있다. 허나 기록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면 손씨가 꽤 많이 취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1심 판사는 공소장 외에는 그 어떤 수사 기록들에 대해서도 열람복사를 허가하지 않아 구체적인 기록을 볼 수 없었다. 통상 피고인 변호인과 달리 피해자 변호인은 기록 열람이 쉽지 않다. 권 판사는 증거 유무를 조건부로 공소장 변경이 가능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줬기 때문에 1심 때와는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사례가 있다.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성기준 판사는, 2019년 3월14일 새벽 1시20분경 대구 달성군의 모 도로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볼보 대형 트럭을 몰다가 앞서 가는 포터 차량의 뒷부분을 추돌한 피고인 B씨에 대해 윤창호법을 적용했다. 당시 B씨의 음주 수치는 0.068%에 불과했다. 물론 트럭이 포터의 뒷부분을 들이받았고 포터에 타고 있던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상해를 입었을 만큼 결과가 중대했다.
성 판사는 직업 운전자 B씨에 대해 “전방과 좌우를 잘 살피고 조향 및 제동 장치 등을 정확히 조작하여 안전하게 운전하여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었음에도 음주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던 중”이라고 판시했다.
보통 판결문에는 혀꼬임, 비틀거림, 혈색 등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 해당되는 표현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성 판사는 단순히 B씨가 준수했어야 할 의무사항을 소홀히 했다는 점만 적시했다. 정 변호사는 그런 B씨의 구체적인 음주 상태가 판결문에서 생략됐을 수도 있다고 전제했지만 0.068%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인 점을 감안했을 때 결국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판단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해석했다.
손씨 사례와 놓고 비교해봤을 때 B씨의 음주 상태로도 윤창호법이 적용됐던 만큼 선희씨 가족들과 문 변호사가 공략할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승희씨는 윤창호법의 헛점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언론 대응을 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 대표적인 음주운전 사건의 피해자 故 윤창호씨 친구들과, 故 쩡이린씨 친구들 역시 승희씨의 뜻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구체적으로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실에서는 승희씨의 민원을 받아 윤창호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해외 입법 사례 및 헌재의 결정 내용 등에 대한 검토를 마쳤다. 의원실은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 면허취소 기준 0.08% 이상일 경우 일괄적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로 자동 의율되도록 보완할 계획이다. 다만 정 변호사는 쩡씨 사례와 같이 0.08%에는 미치지 못 하지만 여러 정황상 중대한 결과가 발생했을 때에도 윤창호법이 적용될 수 있도록 “면허취소 기준에 준하는 음주 수치”란 대목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선희씨 가족들은 손씨측과 합의를 볼 생각이 없지 않았다.
손씨 아버지로부터 3000만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선희씨 가족들이 합의서를 써주지 않자 손씨측은 돌변했다. 적반하장식의 발언이 있었다고 했다. 이를테면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빨리 합의를 해줘야 한다”면서 압박했고 “사람이 죽지도 않았고 그냥 벌 받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평범한미디어 취재 결과 손씨 가족은 손씨에 대해 “뭘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음주운전의 고의성을 조각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가족들은 선희씨의 간병비만 연간 6000만원에 달하는 상황이라 3000만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데다 손씨측의 진정한 반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절대 합의하지 않기로 입장을 바꿨다. 선희씨 모친 문진심씨는 평범한미디어와 만나 “합의할 의사가 없고 꼭 강하게 처벌받았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승희씨도 법정에서 “(언니의)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져서 (한숨) 공소장 변경을 강력히 요청드린다. 강력하게 처벌해달라. 저희 가족 모두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져 있다. 꼭 강력하게 처벌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