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인기 없었던 ‘김영삼 정부’를 위한 변론

  • 등록 2024.09.30 21:4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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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이내훈의 아웃사이더] 32번째 기사입니다. 이내훈씨는 프리랜서 만화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주로 비양당 제3지대 정당에서 정치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민생당 소속으로 최고위원과 수석대변인을 맡고 있습니다. 6월말부터 이승만 정부를 시작으로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집권 세력에 대한 특별 시리즈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이내훈 칼럼니스트] 필자 초등학생이던 시절 경복궁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일제시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것은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던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경복궁 한 가운데 버젓이 서있는 이유도 모른채 그저 박물관 견학차 지나갔을 때 바라봤던 추억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그때까지 남아있었던 것은 철거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으로 쓰이다가 대한민국 정부 청사 및 국회의사당 그리고 마침내 박물관으로 용도만 변경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마침내 철거됐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직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정책 중 하나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추진했다. 그로 인해 경복궁은 그제야 비로소 제 모습을 찾았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에 새 둥지를 틀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것은 그 의미가 크다. 박정희 대통령 이래로 이어져온 ‘군인 정치’의 종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통상 개발도상국은 귀족 또는 군인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국가 발전에 한계가 뚜렷한데, 우리나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직접 저항하며 피를 흘려 마침내 민주주의 체제로 힘겹게 넘어왔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치 권력이 조금 더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여건은 갖춰지게 된 것이다. 온전한 의미의 직선제가 이뤄졌더라도 그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하지만, 직선제도 아니었던 군사독재 기간에서 직선제 쟁취는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것에 대해 야권의 비판이 거셌는데 보수우파 세력과의 정치적 야합으로 인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1988년 신한민주당이 각각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으로 갈라진 후 다시 합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김대중에 대한 야권의 지지세가 김영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결국 김영삼은 1990년 1월22일 당시 여당이면서 노태우가 총재인 민주정의당, 야당이면서 김종필이 총재인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을 밀어부쳤다. 그렇게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는데 민자당은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 지금의 국민의힘이 됐다.

 

당시 민자당은 원내 218석을 갖고 있는 거대 여당이었다. 노태우가 민자당의 초대 총재를 맡았는데 김영삼은 1992년에 총재로 취임하게 된다. 당시 정당 정치가 지금과 달랐던 점은, 당대표인 총재가 대선 후보를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992년 총재로 취임한 김영삼 총재가 형식적인 경선을 거쳐 대선에 출마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1992년 12월 18일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41.96%를 얻어 33.82% 김대중 후보와 16.31% 정주영 후보를 제치고 대권을 차지했다. 그 직후 김대중 후보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김영삼 대통령은 야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군부 세력과 연합해 정권을 창출했는데 취임 후 군부세력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지게 하는 일을 머뭇거리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회 청산과 5.18 특별법 제정이다.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의 비밀 사조직으로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성공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 모임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한지 11일째인 1993년 3월8일 기습적으로 하나회 출신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보직해임하고 4시간만에 후임자를 임명하면서 총 3차례에 걸쳐 하나회 출신 장성을 모두 교체했다.

 

5.18 특별법도 강단있게 추진했다. 당시 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5.18 피해자 322명이 전두환과 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는데 검찰은 “집권에 성공한 내란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11월24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에게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안겨운 당사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5.18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냈다. 그러면서 민자당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당연히 특별검사제 도입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정치권과 여론의 압박에 검찰은 스스로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과 노태우 등 내란 수괴들을 대상으로 재수사를 벌여 구속기소를 완성했다. 재판 결과 2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이 선고되었고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를 대법원이 기각하여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했어도 국민 여망을 막을 순 없다는 선례였다.

 

김영삼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개혁은 역시나 금융실명제다. 그 이전에는 가명 또는 무기명 거래가 용인되었는데 소위 지하경제에서 떠도는 검은 돈이 문제가 됐다. 1991년 당시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가 GNP의 19~40% 수준에 이르렀을 정도여서 부정부패가 지금보다 만연했고 정부의 금융 및 재정정책이 효과를 내기 어려웠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였는데 정치권을 금융개혁의 소용돌이로 몰려는 의도였다. 그런 가운데 1993년 8월12일 은행이 모두 문을 닫은 오후 8시 김영삼 대통령은 ‘긴급 경제재정 명령’을 발표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시행했다. 당연히 기업과 정치권의 반발이 거셌지만 금융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거셌기에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금융실명제는 결국 안착했고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 이전의 지방자치제는 유명무실 그 자체였다. 권위주의 정부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목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이 지방자치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1989년 지방자치법이 통과되어 마침내 1991년 기초의회선거와 광역의회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여권은 경제 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자치단체장 선거를 유보하여 반쪽짜리 지방자치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김영삼 정부가 개정해 1995년 마침내 자치단체장도 직선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현재에도 실질적인 지방자치는 요원한 상태라고 진단하고 있다. 중앙정치권과 국회가 모든 정치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고,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선거운동을 도울 사람으로 구의원 후보를 공천하는 관행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선이 시급한데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전에 쓴 을 참고하기 바란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 지지율 폭락에 직면했는데 워낙 커다란 사건사고들이 많았다. 1994년에는 성수대교가 붕괴했고,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렸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드라이브가 걸린 압축성장의 부작용이 김영삼 정부에 와서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연이은 대형 사고로 민심이 흉흉한데 1997년 2월에는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고, 12월에는 외환 유동성에 대처하지 못 해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 체제로 돌입하게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거기에다 스스로 구속시킨 것과 마찬가지인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을 사면(유력 대권 주자 김대중과의 합의에 따라)까지 했으니 여러 긍정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에 대한 민심은 싸늘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김영삼 정부는 우리나라가 마침내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에 빠르게 적응했다는 사실을 증명해낸 정부라고 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우리나라가 조금 더 일찍 세계 금융시스템 속으로 편입될 수 있었고,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을 통해 자칫 구부러질 뻔한 역사관을 바로 세웠다. 혹자는 3당 합당을 야합이라며 비판하지만 권력 쟁취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현실 정치인 김영삼은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김영삼 정부는 군부와 타협해 권력을 잡았지만 군부가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우리나라가 세계와 경쟁할 수 있도록 경제 시스템과 역사관을 바로세우는 데 전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2015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합병증으로 영면에 들었는데 그나마 여야 정치권 모두로부터 온전히 추모를 받을 수 있는 매우 드문 정치인이 아닐까 싶다.

이내훈 pyeongbummedi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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