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30일 광주에서 <팬덤 정치,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개최된 박상훈 박사의 강연과 대담을 정리한 기획 기사 시리즈 5편입니다.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조선시대처럼 왕이 맘대로 결정하거나, 독재정권의 제왕적 대통령이 밀어붙이면 아주 빨리 결정할 수 있다. 국가 중대사를 속도감있게 결단낼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민주주의는 느림보다.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조율해서 합의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당과 정치인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 자체에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을 수렴하는 장치가 마련돼 있다. 그래서 느리다.
정치학자 박상훈 연구위원(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아래와 같이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느린 게 미덕이다. 전체주의는 엄청 빠르다. 민주주의는 느린 것 같지만 장점이 있다. 느리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단단하다. 일방적인 주장에 끌려가는 건 개인의 내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이다. 진정한 합의는 이견이 허용되어야 하고 충분히 생각해서 법을 많이 만들면 사람들의 마음은 다 조급해진다.
박 위원은 지난 10월30일 19시 광주 서구 서구문화센터에서 개최된 ‘열린 대담’(정의당 강은미 의원실 주최)에 강연자로 초대됐다. 이 자리에서 박 위원은 의제와 직결된 당사자들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모든 게 다 시민들이 직접 하고 정치인들을 압박해서 직접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다 화를 내고 분노하고 성급해하고 조급해하기 마련이다. 우리 민주주의가 가야할 길은 더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 느리더라도 내가 다른 생각을 가져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억압받거나 희생당하지 않는 이게 진짜 민주주의의 힘이다. 충분히 숙고하고, 충분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나도 우리도 틀릴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자.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여당이 있으면 야당이 있고, 같은 정당 내에서도 여러 정파들이 투닥거리는 것이 민주주의적 풍경이다. 민주주의 자체가 정답이 여러 개라는 것을 인정하는 체제라고 역설했다. 각자의 입장에 따른 판단이 있을 뿐 더 옳고, 더 그른 것은 없다. 그래서 입장을 조율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견을 개진했을 때 공격하고 반발하기 보단 존중하고 관용해주는 문화가 성숙하게 농익어야 한다.
우리 정치의 시민사회적 기반을 보통 학자들은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해도 위협을 당하지 않고, 내가 다른 생각을 갖고 살아도 그것 때문에 마음의 불편함이 줄어드는 근데 그런 풍토가 지금 줄고 있다. 어디 가서도 조금만 이견을 말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보통이 아니게 된다.
박 위원은 팬덤 정치가 맹위를 떨치는 등 점점 관용성이 줄어드는 환경에서는 “좋은 언론이 성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분들 지금 우리나라 언론 지형을 보면 존경하는 언론인이 없다. 존경하는 시민운동가, 언론인, 지식인이 옛날에는 있었는데. 이젠 타인이 상처받는 건 괜찮고 내 권리가 침해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뜻을 합쳐서 협동의 힘을 길러낼 수 있는 구조가 점점 약해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비판적인 메시지를 내는 언론인이나 지식인이 있으면 공격받기 쉽다. 정치만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도 팬덤 정치에 깊은 상처를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정치권만 보더라도 야당과 여당이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인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지만, 상호 존중하고 협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집권 정당은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밀어붙이기 보단 야당의 견제와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정당들은 “협치”라는 표현을 레토릭으로 남발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협치는 정치적 결정에 대해 공동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토론이 필요한 이유는 찬성과 반대 어느 한 편에 진리가 있기 보다는 그 사이에 진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토론하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다수당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게 아니라 야당도 있는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이유는 여야정이 완전히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이에 공공 정책의 조화가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면 여당 책임만이 아니라 야당, 시민, 정부 모두의 책임이고 그 결정을 존중하게 된다.
원래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 정치에서 통용되었던 규범은, 협치와 관용이었고 이를 위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대통령의 권능을 줄여가는 것이 중대한 과제였다.
1987년 이후 우리 민주주의에 문제가 생겼다. 그때 우리가 합의했던 것은 대통령의 불완전성을 견제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력을 줄이고 대통령의 비서 조직이 큰 힘이 작용하지 않도록 그래도 의회 정치나 정당 정치의 기능을 살리자는 취지로 개헌을 그런 방향으로 한 것이다. 근데 어느날 돌아보니까 한국 정치가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 그 다음 대통령의 싸움으로 가게 됐다. 정당들간의 미래 비전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고 지금 누가 대통령이고, 미래에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문제가 헌법 질서의 거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대통령을 배출해서 집권하게 되면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국룰이 됐다. 박 위원은 “대통령의 권력만 너무 세고 정당과 의회의 권력은 너무 약해졌다”며 “대통령 개인의 한계에 의존하는 정치체제를 유지하려고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하고 개헌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환기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 국회는 무슨 문제만 발생하면 법률을 수없이 만든다. 박 위원은 “입법 과잉”과 “정치의 사법화”에 대해 우려했다.
국회에서 법이 너무 많이 만들어졌다. 21대 국회에는 3만건 정도 법안이 발의됐는데 3만건이면 의회민주주의를 시작했던 영국 정치의 거의 200배다. 법이 많이 만들어지는 사회는 절대 평화로울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고소고발이 일본보다 60배 많고 우리나라 소송 건수는 감당이 안 된다. 600만건이다. 근데 법관을 늘릴 생각도 사실 안 한다. 지금 국회의원들도 심심하면 헌법재판소로 달려가고 고소고발을 한다. 현재 국회의원 1인당 평균 고발된 숫자가 5회 이상이다. 이게 정상이 아니다.
물론 여야가 맨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합의해서 통과시키는 법안들이 꽤 많다.
여야가 합의를 해야 법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사실 여야가 합의를 한다. 보통 나라들은 국회 본회의에서 평균 2건 이상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근데 여기는 1만건이니 한 번에 200건 이상 통과시킨다. 근데 이상하지 않나? 맨날 싸운다고 하는데 어떻게 법을 여야가 합의해서 처리하는가? 싸우는 법안들은 다 대통령 관심 법안이다. 대통령 관심 법안에서만 싸우고 나머지 지역 개발 예산 이런 건 다 서로 봐주는 형식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떤 걸까. 박 위원은 “대통령 관심사”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여당은 대통령 공약사항이라고 밀어붙이려고 하고, 야당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 공격하는 방법으로 본인들의 영향력을 추구한다. 이게 지금 우리식 정치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박 위원은 “전직 대통령이 지켜야 될 규범은, 본인은 주권의 위임을 받아 통치권을 행사하고 임기가 끝나면 멈추는 것”이라며 “근데 지금 벌써 살아계신 전직 대통령들이 다 등장했다. 이게 좋을까? 주권을 현재 위임받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어야 하는데 위임 기간이 끝나고도 대통령인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미국이 아무리 이상해져도 트럼프가 나오기 전까진 전직 대통령들의 규범이 지켜졌다. 근데 트럼프 이후 미국 대통령들간의 싸움이 심화됐고 전직 대통령의 규범이 완전히 무너졌다. 민주주의의 역전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에서도 우리가 원했던 것은 3김 이후 그래도 정당 정치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이 못 한 것도 많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딱 하나 잘 했던 게 유럽식으로 이념과 정책에 따라서 지역 정치가 아니라 연합 정치를 한 번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건 옳은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길로부터 너무 멀어졌다.
→6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