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7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칼럼니스트] “은비 살 찌지 않았냐?” 짝사랑하던 그 남자는 그렇게 친구와 떠들어댔다. 한창 감수성 예민할 대학교 신입생 시절. 처음 듣는 몸매 평가를 하필 이 사람에게 듣다니. 그 이후 사귈 때도 이상한 X이었다. 인터넷에 다이어트 방법을 뒤졌고, 당시 유행하던 스쿼트 운동을 발견했다. 하루에 100개씩. 일주일이면 3kg을 뺀다는 후기에 용기가 솟아났다.
방울토마토 1개 칼로리까지 재는 ‘소녀시대 식단’을 함께 한다면 10kg 감량도 시간 문제였다. 매일 열심히 동작을 반복했다. 한 달 뒤 오른쪽 무릎이 아파 걷지 못 하기 전 까지. 병원 검사 결과 오른쪽 무릎 관절에 염증이 발견됐다. 의사는 엉덩이 주사보다 3배 더 큰 주사를 무릎에 놔주며 앞으로 다리 운동은 절대 피하라고 당부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달리기를 포기했다. 18살 때부터 달릴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10년도 더 나이 먹은 지금, 매일 저녁 비엔나를 달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사람의 걷는 속도만큼 살살 달리지만 아무튼 나는 달릴 수 있다. 처음에는 다이어트를 위해 빨리 걷기를 하다 조심스레 다시 달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살이 안 빠져도 좋다. 달리기 덕분에 이미 많은 걸 얻었으니까. 아침에 몸이 가볍고, 밤엔 잠도 쉽게 든다. 4층에 있는 숙소까지 계단으로 달려서 올라갈 만큼 체력도 좋아졌다. 여긴 1층이 0층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5층이긴 하지만.
여드름도 사라졌다. 빛나는 피부, 또렷한 눈, 붓기 없는 얼굴. 거울 속에 있는 이 사람이 나라니! 저녁을 먹고 나면 달릴 채비를 한다. 두툼한 러닝 양말을 신고 무릎 보호대로 오른쪽 무릎을 감싼 후 가볍게 스트레칭도 한다. 처음엔 빠르게 걷다가 그 속도보다 더 느리게 뛰기 시작한다. 낮에는 헤어스타일을 망치며 원망하던 바람도 반갑다. 쉭쉭 몸은 바람을 타고 가볍게 더 앞으로 나아간다. 가라앉았다가 다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를 때 느껴지는 낯선 다리 힘도 좋다. 달린지 10분이 넘어가면 온몸에 땀이 난다. 평생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로 나를 소개했는데 달리기는 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알려주었다. 그렇게 이제는 20분 넘게 달릴 수 있다.
매일 달릴수록 한 번에 뛸 수 있는 거리가 조금씩 늘어간다. 이렇게 몇 년간 몸을 단련한다면 ‘마라톤’도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꿈도 키워본다. 달리는 동안 비엔나는 저녁으로 완전히 뒤덮인다. 낮의 후끈한 공기는 서늘하게 바뀌어 있고 주황빛이 꽤 감돌던 하늘도 남색이 되었다. 해질녘 지저귀던 새들도 이제는 조용하다. 끝으로 계단을 이용해 4층 숙소까지 쉼 없이 달려 올라가면 오늘의 달리기도 끝.
마지막 계단에서 늘 욕이 나올 만큼 힘들지만 그 느낌도 갈수록 사라져간다. 건강해지고 있다. 나를 잘 보살피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다시 달리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 돌이켜보면 도전했을 때 그 결과가 실패든 성공이든 내 세상은 조금씩 넓어졌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 아직도 도전할 게 천지다. 그로 인해 넓어질 내 세계도 엄청나다는 거겠지. 그래서 과거의 상처로 새로운 시작을 망설이는 분들께 비엔나에서 다시 달리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해보면 평생 몰랐던 내 모습을 알 수 있다고. 이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내 삶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줄지 모른다고. 무작정 시작하지 말고 러닝 양말, 무릎 보호대, 스트레칭 같이 간단히 준비하는 것도 잊지 말자. 그 경험으로 당신이 큰 상처를 입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