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 ‘기능적 위선’이 필요하다

  • 등록 2025.06.08 14:27:48
크게보기

※ 대선 TV 토론에서 이준석의 성폭력적인 발언을 듣고 충격을 받은 한 시민으로부터 기고문을 싣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준석의 뻔뻔한 태도와, 그 이후 논란이 된 유시민의 망언을 통해 한국 정치에서 ‘기능적 위선’과 ‘위악’이 어떤 의미인지 통찰력이 담긴 글을 써주셨습니다. 세 편으로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먼저 1편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외부 익명 기고 ‘노멀 피플’] 이번 대선에서 가장 경악스러웠던 사건은 TV 토론 도중 후보의 입에서 성가학적인 발언이 여과 없이 송출된 일이었다. 대통령이 될 자격을 두고 국민 앞에서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서, 해당 발언은 거침없이 전파를 탔다. 언론들은 그것을 ‘OOO 발언’이라 명명했지만 그 단어를 반복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상상을 자극해 메스꺼움을 느끼게 했다.

 

더욱 기괴한 점은, 발화자인 이준석 후보가 그러한 발언을 하고도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사과의 발언이 나오긴 했지만, 사과로 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진정성 있는 사과란 구체적인 경위 설명, 피해에 대한 인식, 재발 방지를 위한 다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심 어린 용서 요청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유감 표명 정도로 사과를 했다. 대선 이후 한동안 그는 자기 발언의 의도가 민주진보진영의 ‘위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발언의 의도는 시시각각 달라졌고 그간 그의 뻔뻔한 태도는 언론을 장악했다.

 

질문의 의도에 대한 그의 변명은 도리어 그가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여성혐오적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애초에 그가 정말로 해당 사건이나 민주진보진영 내부의 진영논리를 의제화하고자 했다면 권영국 후보에게 심각한 여성혐오 발언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이재명 후보의 자녀에 대해 공적인 비판이 가능한지를 직접 묻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방식 대신 유도 심문과 조롱의 형식을 택했고, 이후 상대를 공격하려 했던 의도를 숨기지 않고 전시하였다.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 ‘위선’이라면, 그 자신의 태도는 ‘위악’이라 부를 만하다.

 

 

그의 행태를 보면 항상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정치에서의 위선은 정말 나쁜 것일까? 우리는 선한 사람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까지 선하지 않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지위에 대한 욕망, 타인을 이기고 싶은 충동이 늘 꿈틀거린다. 그렇기에 인간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는 정치인에게 더욱 중요한 덕목이다. 정치인은 공공의 무대에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공공의 무대 앞에서 정치인은 사적 자아를 내려놓고, 말의 형식과 감정의 억제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의 공공 언어 발화자로 다듬어야 한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에서 내면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 정치는 품격을 잃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의 의사 결정 자체가 부당한 것으로 곡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인에게 기능적 위선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기능적 위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상과 실천의 간극이 지나치게 크지 않아야 한다. 기만은 언제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상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현실 안에서 실천해가야 한다. 정치적 이상에 알맞은 실천만이 정치인의 기능적 위선을 정당화할 수 있다.

 

동아시아는 산업 시대 이전에 1억명에 이르는 인구를 하나의 국가 아래 통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가의 극기복례는 국가를 유지하는 원리로 오랫동안 강조되어왔다. 공자는 『논어』에서 “극기복례 위인(克己復禮爲仁)” 즉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극기(克己)’는 단순한 감정 절제나 금욕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중심에 두고 판단하고 말하려는 마음, 타인을 수단화하는 마음을 제어하는 일이다. ‘복례(復禮)’란 그렇게 절제된 자아가 사회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공적인 형식과 규범 안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실천이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 사상은 정치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 심지어 표정과 시선까지도 공동체의 질서와 품격에 포함되는 것이라 보았다. 이처럼 형식을 중시한 유가 사상은, 동아시아가 타 문명권보다 훨씬 더 큰 국가를 안정적으로 지속해온 핵심적 기반 중 하나였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위대한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가 사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1994년 남아공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그는 LA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화가 나고,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공의 미래를 선택했기에, 그는 세계 정치사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된다.만델라 전 대통령이 1994년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많은 흑인 지지자들은 백인 공직자들이 대거 해고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대와 달리 백인 공직자들에게 직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남아공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과 국가 통합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치인으로서 공식 석상에서는 백인에 대한 분노를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완성된 도덕군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적 실천의 방법으로, 사적 감정을 절제하고 때로는 더 나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기능적 위선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덕분에 당시 남아공의 흑백 갈등은 일정 부분 완화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기원 전 동아시아의 공자가 주창한 ‘극기복례’와, 20세기 남아공의 정치 지도자였던 만델라 전 대통령이 보여준 공적 절제의 태도는 유사한 정치적 통찰을 공유한다. 둘 다 개인의 감정을 절제하고, 공적인 형식과 말의 품격을 통해 공동체의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는 통찰 속에서 정치적 태도를 형성했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이 같은 ‘기능적 위선’이야말로 대규모 공동체의 안정과 연대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동양의 유가 사상과 만델라 전 대통령의 삶이 함께 증명해주는 셈이다.

노멀 피플 pyeongbummedia@gmail.com
Copyright @평범한미디어 Corp. All rights reserved.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반룡로 32 101동 116호 | 등록번호: 광주 아00365 | 등록연월일: 2021년 3월24일 | 사업자 등록번호: 704-06-02077 | 발행인: 박효영 | 편집인&총무국장: 윤동욱 | 대표 번호: 070-8098-9673(전화와 문자 둘 다 가능) | 대표 메일: pyeongbummedia@gmail.com | 공식 계좌: IBK 기업은행 189 139 353 01015(평범한미디어 박효영) Copyright @평범한미디어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