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TV 토론에서 이준석의 성폭력적인 발언을 듣고 충격을 받은 한 시민으로부터 기고문을 싣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준석의 뻔뻔한 태도와, 그 이후 논란이 된 유시민의 망언을 통해 한국 정치에서 ‘기능적 위선’과 ‘위악’이 어떤 의미인지 통찰력이 담긴 글을 써주셨습니다. 세 편으로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마지막 3편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외부 익명 기고 ‘노멀 피플’] 이번 대선에서 ‘위악의 정치인’ 이준석이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발언 다음으로 논란이 된 유시민의 발언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유시민은 김문수 후보의 아내 설난영씨의 고졸 취업 이력을 언급하며 그녀를 “찐노동자”라 명명했고 대학생 출신 노동자인 김문수와 결혼해 “균형이 안 맞는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고 단언했다. 나아가 현 상황을 빗대어 “감당할 수 없는 자리”, “지금 발이 공중에 떠 있다”,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발언까지 덧붙이며 노동자 출신 여성이 고위 정치인의 배우자가 된 것을 감당하기 힘든 일인양 묘사했다.

그의 이번 발언은 단순한 인격 모독을 넘어 오랜 시간 ‘탈권위적 진보 정치인’으로 자신을 포장했던 과거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학력과 출신 배경에 대한 뿌리 깊은 위계 의식과 우월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그가 과거 학벌주의를 비판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를 정치적으로 활용해왔다는 사실과, 이번 발언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내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 이유가 학력 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실제로는 정치 노선의 독자성, 당내 계파와의 거리, 그리고 인맥의 결핍 등 보다 복합적인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참고로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고졸 출신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위상은 학력이 아니라 경력과 노선, 그리고 정치적 카리스마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해당 상황을 단순화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학력주의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넣고 당내 주류 세력들에 맞서 정치적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 이번 발언은 그것이 결국 정치적 전략에 불과했음을 드러낸 셈이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해 보였음에도, 그는 반성이나 성찰의 메시지보다는 변명을 택했다. 그것도 본인이 ‘학력주의의 피해자’로 묘사해온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였다. 그는 표현이 다소 거칠었을 뿐 자신이 알고 있는 김문수와 설난영의 관계를 바탕으로 설난영에 대해 ‘내재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내재적 접근이란, 대상 내부의 시각에서 그 정동과 논리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유시민은 정말로 설난영이라는 개인의 내면적 관점에 다가가려 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애초부터 김문수와 설난영의 관계가 청중에게 어떻게 들릴지를 염두에 두고 발언을 구성하고 있었다. 문제의 발언은 분명히 이렇게 시작된다.
설난영씨는 그때 구로2공단에인가 있는 세진전자라는 그 전자부품회사 노동조합 위원장이었어요. 그리고 김문수씨는 한일도루코 금속연맹 산하의 거기 노조위원장을 했죠. 그러니까 김문수씨가 학출 노동자, 대학생 출신 노동자로서 찐 노동자하고 혼인한 거예요. 그러면 그 관계가 어떨지 짐작하실 수 있죠.
유시민의 이 발언은 대선 막바지 단순한 개인의 실언을 넘어 민주당 전체의 위선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인사들은 “우리 당 사람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유시민과 김어준의 설화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실언은 반복적으로 민주당의 공식 입장처럼 비춰져왔다.
만약 해당 발언들이 실제로 당의 메시지와 무관하다고 진심으로 판단한다면 방법은 분명하다. 유시민과 김어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두 사람이 진행하는 방송에 당 인사들이 출연하지 않도록 당 차원의 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대권을 거머쥔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운동 마지막 날 아침까지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직접 출연했다. 정치적 반대자에게 과도하게 공격적이고, 설화가 끊이지 않는 두 사람을 당의 상징적 자원처럼 끝까지 활용하는 모습은,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기만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민주당이 해당 논란에서 정말 기만적인 집단처럼 비춰지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스스로 천명한 정치적 이상 때문이다. 민주당은 강령에서 “모든 사람이 공정하고 동등한 조건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정의로운 나라”, “계층, 세대, 성별, 지역간 갈등을 해소하는 통합의 국가”,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는 포용의 사회”를 추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시민의 노동자 출신 여성 비하 발언에 대해 “우리 당원이 아니”라는 식의 형식적인 거리 두기만 했을 뿐 실질적인 조치는 없었다. 또한 해당 설화와 무관하지 않은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방송은 대선 막판까지 주요 접점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정치적 이상을 말하면서 실제 상황으로 가면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들이 그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할 의지가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정치권 전반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 보수 진영의 경우 그 괴리는 더욱 노골적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12.3 내란을 통해 군사독재를 추구한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키자는 구호가 당연시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은 사적 본심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공적 역할에 맞게 절제된 형식과 정치적 이상에 걸맞은 언어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적 책임감과 이상을 따르려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기능적 위선이 작동하지 않는 정치에서는, 공공선이라는 원래의 목적이 실종된다. 이상을 말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정치는 시민들에게 그저 기득권자들간의 이권 다툼, 이미지 전쟁, 권력 분점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때 정치적 언어는 공적 약속이 아닌, 개인적 이해득실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환멸만을 키우게 된다.
이준석의 위악이 일정 부분 통했던 배경에는, 정치권 전반에 만연한 이상과 실천의 괴리가 있다. 이상은 말하지만 실천은 등한시하고, 말은 요란하되 삶이 따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위악이 위선보다 정직하다고 느낀다. 정치권이 오랫동안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방치한 결과 위선은 이제 기만적으로만 느껴질 뿐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위선보다는 위악이 더 솔직해보이고 끌리기도 하는 현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는 품격을 되찾아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는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실제 자신보다 더 선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능적 위선’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적 위선이 통용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실제로 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는 판단을 유권자들이 내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상만을 반복적으로 말하면서 실천은 괴리된 채 유지된다면, 정치인은 그저 기만적인 사람으로 인식될 뿐이다.
인간은 노골적으로 악한 사람보다, 겉으로는 협력자인 척하면서 내부를 파괴하는 기만적인 사람을 더 싫어하도록 진화해왔다. 인간이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개체의 힘이 아니라 언어와 분업, 사회적 유대가 발달해 복잡한 협업 체계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협업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다면 인간은 대형 초식동물이나 포식자에 맞설 수도 안정적으로 자원을 확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협업 체계를 유지하고 보호하려는 능력은 인간에게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적응 전략이었다. 협업 체계는 비용을 나누고 이익을 공유하는 구조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비용은 줄이고 이익은 더 많이 가져가려는 사람이 생기면 체계는 빠르게 붕괴한다. 그래서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협력자와 기만자를 구별하고, 기만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발달시켜왔다. 생존을 위해 협업 체계를 유지하려면, 기만자를 조기에 탐지하고 응징하는 본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노골적인 악인은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기만자는 협력자인 척하며 내부로 들어와 체계를 파괴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기만자에게 더 빠르고 철저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 개인이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직접적 책임을 묻거나 곧바로 불이익을 안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가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고 곧 이탈한다. 반면 일부 정치 고관여층은 정당과 정치인을 ‘내 편’으로 동일시하며 그들의 위선이나 기만을 스스로 정당화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해당 진영이 내세우는 가치를 실현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정치는 다양한 가치를 논의하는 장이 아니라 누가 이기느냐의 게임판처럼 변질되었고 그런 구조를 가능케 한 데에는 이들의 방조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 그렇게 정치의 품격이 무너졌다.
명심해야 할 것은 ‘정당 일체감’을 갖고 특정 진영의 정치인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면 그 정치 세력은 이상과 괴리된 실천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렇게 형성된 정치 구조 속에서 새롭게 정치에 유입되는 세대는 기만적인 기성 정치에 실망하고 그 반작용으로 위악적인 정치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 결과가 바로 이번 대선에서 이준석의 8% 득표였다. 이준석의 8% 득표는 2030 남성의 극우화, 펨코화, 보수화 등으로 단순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기만적으로 보이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파고든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발언 방식이나 정치 전략이 적절했는지는 별개로, 그가 건드린 감정의 지형은 기성 정치권이 만들어낸 실망과 환멸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득표율은 특정 세대의 정치 성향보다 정치권 전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지표로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이준석에 대한 지지는 기만적이라고 인식되는 정치인들 그리고 정당 일체감에 사로잡혀 자기 진영의 문제를 외면하는 기성 정치문화에 대한 반감으로도 읽힌다. 실제로 경향신문의 유권자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지지는 적극적인 지지보다는 양당 후보에 대한 깊은 실망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괜찮은 후보가 없어서 그나마 나은 사람을 골랐다”, “양당 모두 실망스럽다”는 발언들은 이준석이 ‘소극적 대안’으로 선택된 측면을 잘 보여준다.
한국 갤럽의 대선 사후 조사에 따르면 이준석 지지자의 33%는 투표 1주일 이내에 지지 후보를 결정했으며 이는 주요 후보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였다. 이는 마지막까지도 기존 정당의 후보에게 확신을 갖지 못한 유권자들이 결국 이준석을 선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이준석 지지자 중 80% 이상은 TV 토론을 주요 정보원으로 삼았다고 답했다. 이준석은 TV 토론에서 주로 이재명 후보의 사법 리스크와 민주당의 정책 실패를 공격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자극하며 정치적 정체성과 무관하게 실망한 유권자들의 일부 선택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네거티브 공세 위주의 전략이었지만 그 전략이 통했던 이유는 정책적 지향보다는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반감이 결정적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현재 심각한 갈등에 직면해 있다. 언론 정치면에서 ‘내란 세력’, ‘반국가 세력’과 같이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다. 시민들이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에 정당 일체감을 가지게 되면 상대 진영의 문제만을 비판하는 데 몰두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는 어떤 정치적 성과도 이루기 어렵다. 진보에는 진보의 가치가 있고, 보수에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 이 두 가치가 조화롭게 실현되는 사회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정치권이 이상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현실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적은 정치 그래서 ‘기능적 위선’이 다시 작동할 수 있는 정치 문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문화는 시민들의 감시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감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치를 진보와 보수의 대립 구도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권력자와 시민이라는 구도로 정치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시민들이 ‘시민 일체감’을 바탕으로 권력자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여기서 시민 일체감이라는 개념은 시민들이 특정 정당 이전에 공공선의 감각을 공유한다는 뜻에서 내가 제안을 해보는 것이다. 시민들이 이런 감각을 회복할 때 비로소 정당과 정치인을 넘어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한 시민 일체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일지라도 그 정당이나 정치인이 내세운 정치적 이상과 실제 언행이 어긋난다면 단호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주장한 이상에 정면으로 반하는 불의를 방치할 때에는 더욱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시민들이 이러한 태도를 공유하고 함께 실천할 때 비로소 정치권의 윤리적 감각도 회복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상대를 향한 공격적 욕망을 여과 없이 분출하는 이준석과 같은 위악적 정치인이 지지를 끌어모으는 현실이 반복될 것이다.
정치는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치권이 말하는 이상과 실제 실천 사이의 간극을 좁혀야 한다. 그 간극을 메우는 힘은 시민들의 감시에서 비롯된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진영의 위선만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 윤리를 회복하려면 ‘우리 편’의 기만에도 눈감지 않는 시민 의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