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일본 연예인들 앞에서 개그우먼 조혜련씨는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소개했다.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딸에게 평생 교육을 못 시켜줘 미안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가난을 핑계로 딸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 했다. 조혜련씨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마지막 임종까지 미안하다고 했다. 죽기 직전까지 딸에게 사과한 것이 가슴이 아프다”고 전했다. 사실 아버지는 자식들과 소통하려고 했는데 조혜련씨를 비롯한 자식들이 거부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남는다.

조혜련씨는 15일 14시 광주 서구에 위치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뮤직토크쇼에 참석해서 본인의 인생을 회고했다. 요즘 조혜련씨는 남편이 제작한 연극 <사랑해 엄마>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사랑해 엄마라는 제목을 들어보면 진짜 느낌이 오지 않은가. 근데 참 이 연극을 하면서 회복이 있었던 게 내 남동생이 8남매 중 막내인데 얘가 참 말썽꾸러기였다. 근데 이번에 이 연극을 하게 된 계기가 걔가 너무 연기를 하고 싶다. 그래서 그 동생 살리려고 했던 그 연극이 이렇게 히트를 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깨닫게 되고 특히나 남동생이 엄청 회복이 있었다. 아버지하고의 어떤 상처가 있었는데 그거를 연기를 하면서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얘가 완전히 달라져서 딴 사람이 돼버렸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뭘 계산하지 않고 하니까 진짜 이렇게 아름다운 일들이 생기더라.
이날 강연장에는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자리를 채웠다.
다른 분들이 오해를 하더라. 조혜련이 뭘 이렇게 강연하면서 가르친다. 내가 뭘 가르치나. 다 이렇게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나보다 인생 선배도 계시고 해서 그냥 이렇게 해보자. 우리 인생을 한 번 쭉 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왔나. 앞으로 어떻게 살 건가. 같이 한 번 계획 짜보는 그런 시간 괜찮은가? 보니까 진짜 80대부터 20대까지 거의 60년을 아우르면서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조혜련씨는 경남 고성이 고향이다. 그 시대에는 다 그랬듯이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는데 계속 딸만 태어나는 집안이었다.
나는 전라도쪽이 아니라 경상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돼. 여기도 남아선호 사상 장난 아니잖아. 우리 때가 다 그랬잖아. 무조건 아들 낳아야 된다고 그래갖고 조혜련씨 집안에서 애 낳기를 시작한 것이다. 첫째는 딸을 낳았다. 둘째도 일단 딸이다. 셋째는 이제 딸이다. 다섯째를 가졌는데 호랑이가 배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꿔서 100% 아들이라고 기도했는데 그 애가 나다. 머리만 봤을 때 완전히 장군감이다. 여섯째도 딸을 낳았다. 일곱째도 딸을 낳았다. 그리고 아까 말한 여덟째 조지환이가 바로 막내 아들이다. 진짜 아들이 태어나면서 남녀 차별이 너무 심해. 주로 아버지하고 남동생은 육류, 생선류이고. 우리 가시나들은 맨날 밭에서 캐는 쑥갓 상추, 시금치에 밥 반공기. 하루는 내가 밥을 먹다가 밥 숟가락을 집어던지면서 내가 무슨 토끼야! 나도 고기 좋아! 그랬더니 엄마가 들고 있던 나무 주걱으로 내 머리를 치면서 쳐먹지 말라! 먹기 싫으면 나가라! 배가 불러가지고! 고추도 없는 게. 고추 없으면 다 배신자야 뭐야. 그렇게 핍박을 했다.
조혜련씨 가족은 경기도 군포로 이사를 가서 본격 장사에 나섰다.
저희는 고성에서 살다가 경기도 산본(군포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거기 가서 이제 엄마가 농사를 지었는데 쑥갓을 도매로 팔았다가 소매로 직접 팔아본다고 안양 중앙시장에 가는 거야. 거기를 너무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냥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갖고 이제 쑥갓 한 30단을 다라이에 이고 엄마를 따라 나섰다. 엄마가 쭈뼛쭈뼛 장사를 못 해. 아니면 말지 뭘 쳐다봐요! 하면서 싸울 뿐이다. 근데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인데 그때부터 요령이 있었다. 좀 잘 턴다. 안 사가고 가는 아줌마한테 쑥갓 안 사가면 꿈에 나올 거다. 너무 귀엽다고 사주고. 그렇게 4년을 장돌뱅이로 살았다.
조혜련씨에게는 큰 깨달음을 준 은사님이 있다. 일명 “혜련 켈러”의 삶을 만들어준 은혜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끈기 있게 팔면서 집안의 생활비를 대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 인생 스토리가 있다. 그날도 비가 오는 날 쑥갓을 팔고 있는데 12단이 남은 거야. 덜덜덜 떨면서 파는데 어떤 남자분이 오더니 그 쑥갓 다 달라고 그랬다. 알고 봤더니 담임 선생님 남편이었던 것이다. 조혜련이 장사한다는 걸 알고 용기를 주고자 본인이 직접 가면 자존심 상할까봐 남편을 시켜서 다 사가고.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지금 40년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그 얘기를 잊지 못 한다. 마치 진짜 설리반 선생님이 헬렌 켈러를 만들어줬듯이. 이렇게 혜련 켈러를. 그래서 그 선생님의 가르침에 아마 지금까지도 나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걸 되게 좋아한다. 작년에는 케냐에 갔는데 내가 월드비전 홍보대사다. 물도 없고 뭣도 없는 그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만나고 물론 홍보를 위해서 촬영을 한 것도 있지만 그중에 두 아이를 아들 삼았다. 다니엘과 모리스라는 아이인데 우리가 갔을 때 걔네 엄마가 돌아가셔서 말라리아로. 그래서 남의 집 허가를 내서 사는 것이다. 신발도 없어서 맨발이었고, 밥을 먹어야 되는데 숯을 만들려면 6일이나 걸리고 그렇게 해서 옥수수죽 한 그릇 먹는다. 그 아이들을 마을에서 빼와서 공항 근처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했고 지금도 학교를 다니고 있다.
사랑과 헌신이 그대로 이어져 또 다른 실천으로 발전했다. 조혜련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날 아껴주고 진짜 마음 써줬던 은사님의 사랑이 아마 내게 가슴에 울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는 개그우먼이 됐던 과정을 소개할 차례다.
엄마가 다 모여 봐라고 하면서 선포를 하는 것이다. 니네 여자들 인생에는 대학이 없다. 대학은 아들만 간다. 니네는 무조건 고등학교 졸업하면 돈 벌어라. 대학 가면 다리 몽댕이 문지러진다라는 것이다. 그땐 한 번도 대학 갈 마음이 없었는데 근데 엄마가 가지 마라고 하니까 무조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진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한양대 공대를 담임이 써줬다. 그 정도로 성적이 나왔다. 근데 원서 내기 3일 전 친구 3명이 나를 찾아와서 혜련아 우리가 니 인생에 대해서 회의를 좀 해봤어. 걔네가 뭔데 회의를 해. 그랬더니 너는 연극영화과에 가야 돼. 너는 그 에너지가 있어. 그 친구들이 교회 친구들이었는데 참 날 되게 많이 아껴주고 그랬던 것 같다. 원서 내는 날 연극영화과로 원서를 냈다. 그리고 18대 1인데 한 번에 붙었어. 근데 연극영화과 하면 보통 분위기가 신애라, 최수종, 하희라 막 이런 분위기인데. 근데 나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갔는데 선배가 이문식, 권해효, 홍석천 등등 애매모호한 애들이 성적 위주로 뽑아가지고 전체적으로. 엉겁결에 같이 뽑힌 거다. 그리고 우연히 김국진씨를 만나게 돼서 KBS 대학개그제 1회 때 시험을 같이 봤다.
그러나 떨어졌다. 유재석, 박수홍, 김용만 등 기라성 같은 개그맨들이 그때 탄생했는데 조혜련씨는 2차에서 떨어졌다.
심사위원이 얼굴이 방송용이 아니라 주방용이라 진짜 유감스럽다고. 그래도 위로가 됐던 건 나 떨어질 때 이영자씨도 같이 떨어졌는데 진짜로 떨어졌다. 나는 크게 좌절을 맛봤다. 나는 안 되나 보다.
상처를 받은 조혜련씨는 휴학을 하고 과자공장에 취업해서 8개월간 일했다. 하루 12시간씩 일만 하며 고생을 했다.
그렇게 8개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제 나올 땐 꼭 마음을 먹은 게 있는데 그게 바로 개그맨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이 봉숭아학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렇게 웃었다. 행복해보였다. 나도 사람을 웃기는 일을 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1992년 겨울에 개그맨이 됐다. 지금까지 내가 된 이야기를 여러분한테 브리핑을 한 것이다.
그렇게 33년이 흘렀다.
나는 개그 한 길을 웃기는 여자로 한 직종에 33년간 있으면서 물론 가수도 하고 축구도 하고 여러 가지 했는데. 여러분은 뭐가 가장 기억에 남았는가? 내가 했던 캐릭터나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는가? 울엄마 경석아? 태보 다이어트? 골룸? 아나까나? 골때녀?
20년 전 조혜련씨는 일본에 진출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회상했는데 “그때도 한국에서 바빴는데 갖고 있는 에너지가 그걸로 만족을 못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일본 여행 갔다가 일본 방송을 봤는데 내가 일본어를 하면 일본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마음먹을 수도 있잖아. 그러고 혼자 공부를 해. 그리고 일본 매니저를 만나서 6개월 동안 매일 단어 100개를 외워서 1만 단어를 외웠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7년 동안 일본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을 한다. 그래서 조혜련이라는 이름을 일본에 많이 알렸다. 지난 7년이라는 세월이 내게 참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힘든 일이었다.

드디어 서두에 소개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근데 우리 오늘 급하게 모인 조혜련 팬클럽들은 오늘 팬클럽이지 않은가. 조혜련 좋아서 온 거잖아. 여러분들이 일본 활동한 거를 많이 보지 못 하셨을 것 같아서 자료를 준비했다. SBS <강심장> 같은 프로다. 그래서 감동의 이야기를 코미디언들이 하는 것이다. 30명은 일본 코미디언이었고 1명이 나였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다.
준비한 영상이 나오는데 객석에선 눈물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어로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순간 감동이 밀려왔다. 조혜련씨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정말 공감하는 이야기이고 우리 아버지 요즘에 더 많이 생각나고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옛날에 예대를 나오셨다. 그러니까 서라벌 예대. 지금의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왔는데 내 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안타까운 건 아버지는 그 젊었을 때부터 폐가 안 좋아서 소위 폐병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약이 좋아서 금방 고칠 수 있지만 그때는 각혈을 했고 늘 이렇게 가래를 뱉어냈고.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삐쩍 말라가지고 본인의 일을 잘하지 못 했다. 그래서 늘 엄마한테 구박을 받고 우리한테 그게 미안했는지 항상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러서 짐 자전거에 노란 점퍼를 입고 이렇게 웃으면서 다니시던 아빠가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내가 연예인이 된 걸 너무 좋아했다.
본인의 꿈을 이어갔다는 생각에 딸을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실제로 조혜련씨의 방송 출연 영상을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해놨다고 한다.
나한테 니가 낳은 서경석이 왜 안 데리고 오냐고. 걔는 니 아들이다. 근데 나는 그런 개그를 받아줄 수가 없는 거야. 어느 날 갔더니 또 혜련아. 나 <태조 왕건> 한 번 출연하고 싶다. 막 이러면서 최수종이 연기 너무 잘하는데 아버지도 서라벌 예대 안 나왔나. 국장님한테 얘기해서 한 번 출연하자. 스케줄 잡아라. 막 이러는데 너무 철이 없는 것이다. 아버지 나는 드라마에는 못 나간다. 아버지 진짜 이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아는가? 제발 용돈 드리면 편하게 사세요. 아 미안하다. 괜한 얘기를 했다고 또 부끄러워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으로부터 한 22년 전이다. 임종을 앞두고 정말 말라서 이제는 이제 정말 미음도 못 넘길 정도였다. 마지막 날 가족들이 다 왔지만 날 좋아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실눈을 뜨고 저희를 좋아한다고 쳐다보면서 내가 도착하자 아버지가 날 눈으로 부르는 거다. 그래서 아버지 나 왔어요. 무슨 할 말 있어요? 그랬더니 미안하다 그러고 정말 숨을 못 쉬셨다. 난 사람이 이렇게 임종 때 어떻게 생명이 빠져나가는지를 직접 봤다. 얼굴 색깔이 변한다.
조혜련씨는 아버지의 마지막 메시지가 “미안하다”였다는 것에 대해 “너무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개그우먼이 된 이후로 내내 들었던 말인데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는데 마지막까지 들은 게 너무 속상했고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다 한 달 뒤에 내가 어떤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강산에의 ‘라구요’라는 노래인데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근데 아버지가 왜 미안했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 거야. 내가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아버지는 우리한테 말을 걸려고 했는데 우리가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 제발 그런 얘기 그만해요. 아버지는 우리한테 진심을 얘기하고 싶었으나 그걸 돌려서 개그로 하면 우리는 그거를 약간 좀 뭐랄까. 좀 너무 재미없는 그리고 막 말도 안 되는 개그하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렸다. 그게 너무 후회됐다. 내가 사실 (왕건 출연 부탁을) 하려면 할 수 있었다. 포졸이라도 뭐라도. 그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내가 묵살시켜버리는 그게 너무 후회가 됐다. 딸의 때늦은 후회였다. 그렇다고 뭐 살아 있는 엄마한테 잘하냐? 그것도 아니다.
조혜련씨는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라며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 해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환기했다. 정말로 그렇다. 살아 있을 때는 언제나 곁에 있을지 알고 뒤로 미루고 미루다가 부모에게 따듯한 말 한 마디 못 하고 떠나보내곤 한다. 그래서 조혜련씨는 “지금이라도 잘하면 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