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인간은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언어에 둘러싸여 삽니다.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주요 의사소통 수단인데요. 우리는 언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무언가를 설명하고, 누군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언어는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현실을 창조하고 변화를 불러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11번째 칼럼에서는 언어의 힘을 연구한 20세기 철학자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에 대해 다뤄볼까 합니다. 현실을 구성하는 언어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언어는 진리를 전달할 때만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언어는 세계를 설명하거나 기술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에 대한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스틴은 이런 가정이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던 언어가 다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죠. 오스틴은 참과 거짓을 가를 수 있는 문장을 진술문(statement)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날씨가 맑다", "나는 오늘 점심에 유부초밥을 먹었다", "4학년 1학기 성적 평균은 4.5점이다" 등은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명제입니다. 그런데 진술문처럼 보이지만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게 의미없는 경우도
[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인기있는 문화 콘텐츠는 그 시대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1978년 출판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우리는 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간접 경험할 수 있고, 1987년 발표된 소방차의 노래 <어젯밤 이야기>는 당시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댄스 노래로 대중음악의 변화 양상을 보여줍니다. 1999년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쉬리>는 국내 첫 200만 관객 돌파 영화인데 그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당시 한국 영화의 성장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수많은 부모님들의 속을 끓게 했던 <스타크래프트> <바람의나라> 등과 같은 게임은 지금 돌아보면 디지털 문화의 성장을 상징하는 콘텐츠입니다(사실 두 게임이 90년대에 출시되었다는 건 비밀입니다). 2013년에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는 급증하는 1인 가구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프로그램이죠. 어떤 콘텐츠든 어느 정도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회를 비추는 거울 넷플릭스 시트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제가 최근 며칠 동안 빠져있는 콘텐
[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집이라는 공간의 성격이 바뀌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직장인은 재택 근무를 하고 학생들은 집에서 수업을 듣습니다. 붐비는 곳을 피해 집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심지어 온라인으로 만남을 갖는 경우도 있죠. 홈트레이닝을 통해 건강을 챙기는 홈트족도, 집에서의 활동을 SNS로 인증하는 놀이 문화도 생겼습니다. 업무, 교육, 사교, 운동, 문화생활 등 집의 기능과 역할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집 외에도 여러 공간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이런 변화는 코로나가 종식되면 사라질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장기간에 걸친 코로나 팬데믹과 기술의 발전으로 공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관계를 보여주는 거리감 여러 학교를 다니며 강의를 하다보면 강의 조건이 천차만별입니다. 대강당에서 100명이 넘는 학생과 수업을 할 때도 있고, 일반 강의실에서 20명 남짓의 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온라인 공간에서 수업을 많이 하죠.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수업을 하느냐에 따라 말투나 태도가 달라집니다. 소규모 강의에서는 장난도 치고 편하게 대하지만 대강당에서는 저도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