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15일 14시반 광주 호남대에서 노홍철씨가 청년 창업가들과 진행한 <창업 토크쇼>의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 시리즈 2편입니다.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방송인 노홍철씨는 2014년 음주운전 문제로 <무한도전>에서 하차한 이후로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등 마음을 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내 2016년 용산에 있는 건물을 매입해서 책방을 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책방? 그를 아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에서 큰 실수를 하고 손가락질 받을 때 서점을 연다고 하니까 다 반대했다. 그리고 대형 서점들도 다 쓰러지고 있어서 무조건 서점은 사양산업이라 안 된다고 했다. 누가 요즘 종이책을 보냐? 이 디지털 시대에 다 전자책이다. 여러분들처럼 젊은 사람들 말고 어른들도 전자책을 보는데 누가 종이책을 사러 서점을 가냐? 그리고 대형 서점의 마케팅을 어떻게 네가 따라잡냐?
노씨는 지난 15일 14시반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호남대 야외 중앙주차장에서 개최된 <창업 토크쇼>에 연사로 초대됐다.
근데 “하지 말라고 못 하게 하니까 더 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 노씨는 “그래서 말도 안 되게 정말 달동네, 찾아오기 어렵고 정말 입지적으로 최악인 곳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정말 너 충격이 컸구나. 사고치더니 너 어떡할려고 그러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철든책방’을 열었다.
좀 유리한 점은 대중들한테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까 그리고 그때 좀 레어템이었다. 왜냐면 활동을 왕성하게 하다가 갑자기 안 하니까 궁금하지 않겠는가. 헤어진 여자친구도 새로운 인연이 생기면 잊고 살다가도 궁금해지지 않는가. 그러면 가끔씩 SNS로 엿보고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 돼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해진다.
노홍철다웠던 것이 <무한도전>에서 볼 수 있었던 그의 자가용에 자기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졌듯이, 서점에는 자기 흉상을 세우려고 했다. 노씨는 “내가 생각했을 때는 막 사람들이 되게 좋아할줄 알았는데 너무 흉하게 보고 근데 나는 책방 안에다가 이런 것들을 계속 만들어놨다”고 설명했다. 셀럽 마케팅도 했다. 노씨는 책방 운영 소식을 연일 SNS에 업로드했다.
내가 굉장히 재미있게 하는 걸 SNS에 올린 다음 내 동료들한테 이게 얼마나 재밌는지 니네 알아? 어필을 했더니 동료들이 와줬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김제동 형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책방에선 할 수 없는 변별력이 생긴 것이다. 그 달동네에 정말 오르막에 너무 형편없는 비좁은 골목길인데 한 1km 정도의 줄이 생기고.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2호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홍철이 하는 책방이었기 때문에 노홍철이 “부재 중일 땐 매출이 뚝 떨어지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닥쳤다. 물론 노씨는 다른 유형의 상점들과 달리 컨셉이 있는 책방이었기 때문에 코시국 한동안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방역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임시로 문을 닫았다. 그때 노씨는 “이렇게 코로나가 길어질줄 몰랐다”고 회고했다.
노씨는 책방 오픈 이후 2년만에 해당 건물을 팔아서 7억원의 시세 차익을 얻었다. 부동산 투기 논란이 일었지만, 용산구 후암동에 별도로 건물을 다시 매입해서 2020년 1월 책방과 빵집이 결합된 ‘홍철책빵’을 열었다. 건물 1층은 책방과 카페, 2층은 베이커리로 운영되는 형식이다. 처음 빵집을 하게 된 계기는 지속가능하고 투명한 기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좋은 일도 하며 돈도 버는 사회적 기업과 같은 유형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작은 빵집을 하고 있다. 서울에도 있고 경남 김해에도 있는데 매출은 좋다. 매출 훌륭하다. 맨날 놀아도 될 정도다. 근데 실은 내가 10년 전에 똑같은 마음으로 하려고 그랬다. 그때 재석이형(유재석)이랑 어디 기부를 했는데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뉴스를 보고 그 다음부터 우리가 투명한 데다 기부를 하자. 재석이형은 투명하게 공개되는 데다 기부를 했고 나는 방송 전에 했던 게 장사여서 혹시라도 안 좋은 경험을 할 바에야 내가 노력해서 지속가능한 기부가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빵집이었다.
일단 빵집을 운영하려면 빵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열심히 발품 팔고 수차례 시도해보면서 첫 빵을 만들어봤는데 노씨는 “더럽게 맛이 없더라”고 털어놨다.
맛으로 승부할 수 없으니까 그럼 비주얼로 가자. 얼굴 모양으로 해가지고 내 캐릭터로 만들어서 오븐에 구웠는데 단 걸 좋아해서 안에 초콜릿을 넣었다. 빵이 쫙 나오는데 반죽이었을 땐 너무 예쁜데 오븐에서 나오니까 눈 터지고 입 터지고 초콜릿이 너무 징그럽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얼굴을 더 쉽게 곰돌이로 바꿔보고 몇 번을 하다가 결국은 못 했다.
맛과 비주얼. 어느 것 하나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포기했다. 노씨는 “그때 방송도 너무 바쁘고 막 그랬는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며 “방법을 달리해서 지금 홍철책빵이라는 걸 만들었다”고 말했다.
(홍철책빵에서) 장애인들을 고용하고 거기서 수익이 생기고 빵은 좀 원가를 낮춰서 팔고 어쨌든 거기서 수익이 계속 나서 일자리도 창출하고 계속 도네이션을 할 수 있으면 나쁘지 않겠다.
책빵은 대박이 났다. 그래서 2022년 3월 경남 김해 장유동에 ‘홍철책빵 김해DT점’을 오픈했다. 맥도날드도 아니고 드라이브스루라니? 어떻게 DT를 하게 됐는지를 짚기 전에 코로나 극복기부터 들어보자. 노씨는 “다른 업체들은 인건비도 부담되고 본인도 살아야 되니까 직원을 정리하거나 그러는데 나는 못 그러겠더라”며 “마음이 약해서 그냥 직원들한테 월급 주고 계속 만들어라. 그리고 만든 빵을 그냥 의료기관에 기부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그냥 이게 오래 갈지 모르고 기부를 했는데 기분 좋더라. 칭찬도 듣고 나도 혼자 뿌듯하고 그동안 또 잘 된 것에 보답도 할 수 있고 근데 코로나가 1~2년 넘어가니까 적자가 커졌다. 영업은 안 하는데 계속 기부만 하니까 적자 규모가 억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노씨가 돌파구를 찾은 것은 택배 시스템이다.
그러니까 빵 중에서도 흔들리거나 배송이 갈 때 유통기한이나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빵으로 메뉴를 줄이고 스토리를 입혀서 전국으로 배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빵집에 사람은 아무도 안 오는데 비대면으로 빵을 팔기 시작하는데 책방에서 1km 줄설 때보다 더 그냥 한산하게 빵집에서 이런 배송을 하는 게 훨씬 더 큰 매출을 올렸다.
김해에선 DT를 택했는데 노씨는 “보통 프랜차이즈는 기본 컬러가 있고 매뉴얼이 있는데 저희는 완전 다르다”며 “운 좋게 정용진 형님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밥을 먹다가 여쭤봤는데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 매출도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너무 하고 싶은데 가만히 공부를 해보니 드라이브스루는 큰 기업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고 강조했다. 왜 그럴까?
그 시스템이 굉장히 비싸다. 여러분들은 그냥 가서 차 타고 라떼 한 잔 받아오는데 그 메뉴판이 한 4000만원 하고 주문하는 와이어레스 마이크가 한 2000만원 하고 그걸 1명이 아니고 3명이 쓰려면 6000만원이다. 그래서 모니터를 사진으로 대체했다. 1만원 들었나? 그리고 시스템 이걸 제일 싼 거 하나로 혹은 육성으로 했는데 한 1000만원 깨진 것 같다. 그리고 저쪽으로 돌아가면 컴퓨터 하나 해서 2000만원 언더로 만들었는데 굉장히 고민 많이 했다.
김해DT점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변화를 멈출 수 없다. 주말에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지만 평일에는 한산하다. 그래서 노씨는 다시 한 번 세트로 구성해서 택배로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시간이 흘러서 내가 없어도 주말에는 피크를 찍는데 근데 평일에.... 내가 진짜 좀 장사를 잘 하는 편인데 어릴 적부터 했으니까 오래 했으니까. 근데 이걸 내가 계속 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최근 지난주 얘기인데 다시 재정비해서 세트를 만들었다. 택배로 할 수 있게 그래서 주문을 받았고 주문도 SNS로 받았는데 해보니까 너무 시원하게 해결이 됐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큰 매출이 나오더라.
결론적으로 노씨는 “영원한 건 없다”는 문장을 되새기며 계속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장사도 해보고 방송도 해보고 여러 가지를 해보면서 느낀 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건 절대 없다. 내 업종이 계속 바뀌었다. 근데 감사하게 계속 잘 됐다. 잘 되면 계속 하지 왜 계속 바꿔?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 다 경험이다. 아무리 잘 되는 것도 영원한 거 절대 없다. 지금 빵집 근처에 원래 빵집이 하나도 없었는데 엄청 많이 생겼다. 나는 기분 좋다. 덕분에 또 새로운 빵도 만들고 계속 궁리하고 있다. 내일 혹은 내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은 굉장히 좋고 따뜻한데 항상 긴장해야 되는 것 같다.
미니 특강에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 노씨는 청년 창업가들과 진정성있게 소통했다. 받은 질문에 길게 답변했다. 한 질문자가 빈티지 의류 쇼핑몰을 창업하고 싶은데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 준비만 너무 오래하고 있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노씨 역시 의류 쇼핑몰 경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의류 사업이든 뭐든 과정이 완벽하지 않아도 바로 시작해보는 것이다. 부딪쳐보는 것이다.
옷 장사를 너무 해보고 싶은데 방법을 몰랐다. 그냥 인터넷 검색해서 빈티지 도매를 위해 계속 발품을 팔았다. 5000원에 사서 친구들한테 1만5000원에 팔고 2만원에 사서 6만원에 팔고. 돈이 없었는데 이렇게 해서 10만원, 20만원, 100만원 모았던 것 같은데 몇 백만원 모으니까 내 장사를 하고 싶더라.
물론 정답은 없다. 모든 것은 자기 선택이다. 노씨는 “무조건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 당장 사무실 하나 얻기가 쉽지 않다. 노씨는 “메이크샵이라는 걸 이용했었다. 어차피 인터넷은 모니터만 보이지 내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사무실은 안 보이니까”라며 “그렇게 해서 나는 시작을 했다”고 말했다.
빈티지를 그냥 발품 팔아서 사온 다음에 사온 걸 거기다 올려서. 계속 사진 막 찍고 내가 입은 걸 찍어서 올렸다. 진짜 열심히 해서 올렸는데도 매출이 안 나오더라. 근데 내가 터졌던 포인트는 가뭄에 콩 나듯 한 분 두 분이 주문을 하면 그걸 내가 직접 배송했다. 다들 너무 놀란다. 그렇게 신뢰를 계속 쌓았더니 나중에는 소문이 나고 진짜 매출이 늘었다. 돈을 모아서 운좋게 그럴싸한 매장을 차릴 수 있었다.
노씨는 “무조건 타이트하게 했다”면서 “의류 매장을 오픈한 곳이 용산 우체국 건물의 잉여공간이었는데 그 창고를 되게 저렴한 가격에 임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거미줄이 가득하고 벌레가 다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노씨는 도매업체 사장들에게 공을 들여서 얼굴도장을 찍고 옷감을 도매로 대량 사입하지 않고 주문 들어오는 것만 단건 매입하는 방식을 뚫어냈다. 그리고 주문건을 우체국 택배로 재빨리 발송해서 경쟁력을 키웠다. 그렇게 쇼핑몰 회원을 30만명 가량 확보했다. 홈피에는 광고 배너도 붙었다.
(질문자에게) 지금 전혀 준비가 안 되지 않았나? 나는 뭘 하든 절대 준비를 다 해놓고 하지 않았다.
책방도 그랬고 빵집도 그랬다.
책 한 권도 안 보는 애가 어떻게 책방을 만들겠는가? 책을 어떻게 갖고 오는지도 모르고 어떤 책이 사람들한테 인기인지도 몰라서 어떡하지? 진짜 제대로 준비한 다음에 해야 되나? 그냥 열었다. 그냥 열었고 책도 다 채워놓지도 않았다. 내가 쥐어짜고 검색해서 채워도 휑했는데 너무 힘드니까 주변에 책 많이 읽는 애들한테 리스트 받아서 뭔지도 모르는데 그냥 채워놨다. 그런 퍼포먼스를 반복했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계속 성장을 했다.
빵집도 노씨가 살던 집 옷방을 다 비우게 되면서 거기서 시작했다. 중고 오븐기를 구입해서 이 빵 저 빵 다 구워서 SNS에 올렸다.
빵집도 전혀 준비가 안 됐었다. 돈이 있으니까 좋은 오븐기를 쓸 수도 있었다. 근데 가장 싼 중고 오븐기를 사놓고 거기서 구워서 테스트를 해본 다음에 빵집을 연 게 지금 홍철책빵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