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지난 6.1 지방선거 당시 청년박스 김민국 대표와 만나 누구에게 표를 줬는지에 관한 대담을 한 적이 있었다. 김 대표는 당시 청년 정치적 관점에서 지방의원들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싶었다고 했고, 나름대로 선출직마다 정당을 달리 선택하는 자신만의 투표 철학을 갖고 있었다.
굉장히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독고다이 인생 인터뷰 열 번째 주인공은 청년박스를 운영하고 있는 김 대표다.
지난 7월18일 19시경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평범한미디어 사무실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우선 김 대표는 스스로 어떤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까? 사석에서 만난 김 대표는 청년박스를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었는데 “여전히 청년박스 운영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요즘엔 광주시 청년위원회 소통참여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운영위원회 위원 활동까지 겸하고 있다.
청년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광주 청년기본조례에 의거해서 출범했고 총 4개 분과(일자리 분과/교육진로분과/문화삶의질분과/소통참여분과)로 구성되어 있다.
김 대표는 “(청년위원회의 역할은) 좀 더 새로운 정책을 발굴하고 청년들이 가진 문제가 뭔지를 조사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청년정책조정위원회라고 또 따로 있다. 상임기구 같은 역할인데 청년위원회에서 올라온 정책들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사실 가장 대표적인 2가지만 거론해서 그렇지 김 대표의 활동 경력은 정말 다채롭다. 무엇이 가장 힘들까? 역시나 돈 문제가 크다.
이게 다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다. 청년박스도 한창 활성화가 될 때는 주로 활동하는 친구 5명이 있었고 회원도 20~30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이 규모를 계속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금전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하나? 그런 고민도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때문에 청년박스 활동이 잠시 중단된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공익적인 일을 하면 금전적인 문제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운 것 같다.
독립언론, 정치, 시민사회 등 각종 공적 활동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사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돈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김 대표는 돌파구를 찾고 있다. 청년박스를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여 공익적인 활동 뿐만이 아니라 수익을 낼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래서 김 대표는 창업 관련 아카데미를 수강하며 ‘사회적 경제’를 탐구하고 있다.
대외활동과 단체 운영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김 대표는 마음을 다잡는 원동력이 있다고 했다. 일종의 마음가짐이자 김 대표의 가치관인데 ‘이타적인 삶’에 대한 갈구였다.
(내 삶의 가치관이) 남을 도울 때 내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중학교 때 겪었던 터닝포인트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
중학생 때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외모는 준수했지만 다혈질 성격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나를 제외하고 다가오는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친구에게 ‘세 번만 참아봐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세 번 참기’를 실천했다. 그러자 확실히 화를 덜 내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이 정말 감명 깊었다. 고작 중학교 1학년이 했던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
그때부터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줄 때 행복을 느끼고 자존감을 느낀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래서 남을 돕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사고방식이 단순히 개인의 범위를 넘어 공동체와 사회구조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면 훨씬 좋을 것이다.
내 개인으로는 컵라면만 먹고 살아도 크게 불만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 그 자체가 원동력이다.
김 대표는 당시 중학교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냥 귓등으로 흘려들을 수 있었지만 친구의 조언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은 바뀌는 게 쉽지 않은 법인데 사춘기 시절 친구의 노력은 김 대표의 삶을 바꿔놓았다.
독고다이 인터뷰에서 빠질 수 없는 질문이다. 김 대표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의외로 군복무 시절이었다고 한다.
군대가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 직업 군인을 할까도 생각했다. (군대에 온 사람들은) 모두 지역, 환경, 가치관이 다르다. 분대장 활동을 하며 이 사람들을 어떻게 이끌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다른 선임들처럼 폭력을 이용해 통제하기는 싫었다.
김 대표는 “분대원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뭘까?”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그러다가 해답을 찾은 것이 바로 휴가 제도였다.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정말 많이 연구했다. 그 방법들을 통해 휴가도 많이 따내고 노하우를 많이 전수해줬다. 그러다 보니 분대원들에게 신뢰를 많이 얻었다. 분대원들도 휴가를 따내기 위해 군 생활을 더 열심히 했다. 나중에는 우리 분대가 최우수 분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때 사람의 동기와 니즈를 파악하고 제안하는 것들을 많이 시도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군대라는 환경이 좋았다기 보단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해서 인정을 받은 소중한 경험이 의미있었다고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김 대표는 군대라는 폐쇠적인 공간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갇혀 있는 군인에게 휴가는 매우 절실하다. 분대장이 나서서 휴가를 잘 받게 해준다면 분대원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휴가를 많이 얻어낼 수 있었는지 노하우 같은 게 있었던 걸까? 특별한 요령 같은 것은 없었다. 김 대표는 FM 대로 철저하게 군복무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작업 같은 건 아니었다. 나는 GOP이었다. 기본적으로 힘든 곳인 만큼 병 기본에 관련된 체력 단련, 정신 교육을 통한 정신 전력이 매우 중시되었다. 그래서 체력검정이라든가 사격 등 평가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도 전역한지는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염없이 길어진다. 분량 조절에 실패할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한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김 대표도 살면서 고독하고 쓸쓸한 감정을 많이 느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김 대표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왜냐면 외동 아들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맞벌이다 보니 오히려 홀로 있는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어렸을 때는 분명 느꼈던 것 같다. 친구가 없는 것 같고 연락할 사람이 없는 것 같고 이런 식으로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내가 느낄 때 힘들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나를 위한 생각들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니까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김 대표는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을 예로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드래곤볼을 즐겨 봤다. 주인공 손오공이 프리져라는 상대를 만나기 전에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수련을 한다. 나는 10대 때가 그런 과정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이 결코 그냥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드래곤볼 속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공간은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이곳에서의 시간과, 지구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 하루가 지났다면 이 방에서는 1년이 흘러 있다. 이 방에서는 현실 보다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러간다. “하루가 1년 같다”고 하는데 이 방에서는 진짜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마음 수련을 하기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최근 김 대표가 광주청년센터 청년정책홍보단 정책커즈 2기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광주청년센터는 광주광역시의 예산을 받아서 운영되는 중간 지원 조직이다. 거기서 광주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을 수립하기도 하고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한 정책들이 청년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게 청년 정책홍보단 정책커즈다. 하는 일은 영상 컨텐츠 제작이다. 인터뷰랑 브이로그 형식으로 만들고 있다. 청년 정책과 관련하여 청년들을 모집해 브이로그 컨텐츠나 인터뷰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나는 청년박스라는 팀으로 신청을 해서 진행을 하고 있는데 ‘유퀴즈 온더 블록’을 패러디해 ‘뉴스 퀴즈 온 더 블록’으로 이름을 바꿔서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 대표가 소개해주고 싶은 대표적인 청년 정책이 있을까? 김 대표는 ‘청년 일경험 드림’을 꼽았다.
이 사업은 워낙 유명해서 다들 알 것 같다. 나도 이 사업의 수혜자라 이 정책을 가장 좋아한다. 왜냐하면 5시간 근무에 최저시급 보다 높은 광주 생활임금을 받는다. 5시간 일하지만 한달에 130~140만원 정도 받았던 것 같다. 그 정도면 혼자서 어느정도 생활하는데 괜찮다. 그리고 5시간만 일하기 때문에 남은 시간에 자기계발에 힘쓸 수 있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내가 조직 생활에 적합한지도 알아볼 수 있다. 사회성을 기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김 대표의 활동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청년’과 ‘정치’인 것 같았다. 직접 듣고 싶었다. 김 대표의 활동 의제들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파생된 것 같다. 나도 고민을 해보았는데 주체적인 삶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찾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최근 지방선거에서 광주의 투표율이 많이 떨어져 안타까웠다. 지자체의 운영은 우리의 세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적어지면 안 된다. 세금을 내는 만큼 우리가 시민으로서 주체적으로 권리 행사에 앞장서는 게 중요하다. 청년과 정치도 그 중심 키워드 안에서 같이 가고 있는 의제다.
시민들의 주체적인 삶이 사실 곧 정치적 권리와 맞닿아 있다. 거대 담론에 뒤덮여 있는 한국 청년들의 삶은 주체적이지 못 할 가능성이 높은데 마찬가지로 김 대표의 주체성 지향은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관이다.
현장과 이론이라고 했던가. 사회 활동가로 살아오면서 공부하고 배우는 일에 소홀해질수 있다고 봤다. 책을 읽고 탐구하는 일에 대한 시간을 갖기 위해 어떠 노력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김 대표는 본인의 ‘활동 자체가 공부’라고 역설했다.
내가 내 스스로 사회활동가라는 생각은 잘 안 해봤다. 방금도 말했다시피 영상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인터뷰하는 일들을 했었다. 예를 들어 인권에 관한 인터뷰를 할 때는 인권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정치 참여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고 청년 정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관련 공부를 해야 한다. 정책 제안을 할 때도 실태를 조사하고 공부해야 하며 어떻게 제안해야 하는지도 공부해야 한다. 모든 부분들이 다 공부다.
활동과 공부가 분리되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스스로 ‘활동가’라고 네이밍해서 활동의 범위를 제한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민사회 활동가부터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업무와 관련된 공부 같은 것들 말고 기타 평범한 취미생활이 있는지 궁금했다.
일이 취미라고 하면 좀 아닌 것 같다. 최근에 핸드폰 게임을 다시 깔았다. 그러나 오늘 다시 삭제를 하려 한다. 이렇게 시간 낭비하는 일을 가끔 한다. 그 외에 따로 하는 취미는 딱히 없다.
“일이 취미는 아니”라고 했지만 김 대표는 업무와 여가를 따로 분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일이 보람 있고 재밌으니까 여가 시간에도 일을 하는 것이 좋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생각들이나 하고자 하는 것들이 다 일이자 취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내일 면접을 봐야 하는 기자단 활동도 나한테는 이제 취미이고 인터뷰 컨텐츠를 만드는 것도 어떻게 보면 취미다. 모든 활동들이 다 일이자 취미인 것 같다. 그래서 일을 많이 벌려놓고 힘든 것도 있다.
지난 대담 인터뷰 때 김 대표는 ‘지방예산학교’ 과정의 경험이 의미있었다고 들려줬다. 그곳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게 됐고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봤다.
시민에 대해서 배웠다. 이 광주시에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가진 그 권리들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고 그 권리 행사(예산 감시)가 잘 되고 있는지 알아 보는 일을 배웠다.
그러면서 ‘사권분립’에 대해 이야기했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에 더해 언론까지를 포함해서 흔히들 사권이라고 지칭하는데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삼권을 감시하는 시민의 권리로서의 ‘사권’이란 표현이었다.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이다. 우리의 권리를 대변해주는 곳이 의회가 될 수도 있고 지방자치단체로 생각했을 때는 시청이 될 수도 있고 하는데 (모두가 다 나쁘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내 권리는 내가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삼권분립이 아니라 사권분립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으로서 내가 찾아가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권리가 분명히 있다. 따라서 좀 더 능동적인 시민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김 대표의 사회활동에 대해서 주변에서 간섭과 지적질이 많았을 것 같았다. 가족, 친구, 사회적 통념 등이 압박으로 다가오거나 부담을 주지는 않았을까? 이를테면 “그냥 평범하게 회사에 취업해서 살아야지?”와 같은 잔소리가 지겹지는 않았을까?
초반에 나는 주변 보다 나 자신에게서 압박이 제일 심했다. 왜냐햐면 내가 돈을 버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만약에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병원 생활을 할 때 도움을 드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최악의 경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 비용도 마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부분들이 있다 보니 부모님 부양에 대한 부분 때문에 가장 크게 고민했다. 그런 부분들을 혼자 안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부모님과 진지하게 대화를 했다. 부모님에게 내가 성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지? 질문을 했다. 성공한 삶은 경제적인 안정감이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마음 속에 따로 있는 그런 삶이다. 행복한 삶은 경제력은 좀 부족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부모님이 (자식이) 성공하길 바라는 이유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네가 돈을 좀 덜 벌더라도 이 일을 하는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라’고 부모님이 인정해주셨다. 그래서 딱 30세까지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셨다.
부모의 지지는 김 대표에게 큰 힘이 되었다. 부모의 지지와 경제적 뒷받침을 등에 업은 김 대표는 주변에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들이 자신을 부러워할 정도로 자신감을 갖게 됐다.
마지막으로 궁극적인 목표와 꿈을 물어볼 차례다.
하고 싶은 일,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상황과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사회가 될 수 있게끔 노력을 하고 싶고 도움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