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21세기 이래로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2014년), 이태원 참사(2022년), 무안 항공기 참사(2024년) 등 3대 참사를 경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형 참사로 목숨을 잃는 엄청난 비극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참사와 애도, 참사를 전하는 미디어, 뉴스에서 묘사된 참사를 소비하는 일반 국민 등등 아직 우리 공동체는 성숙하지 못 한 부분들이 많다. 광주 MBC 기자 출신 김인정 작가는 이 지점에 천착해서 책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출간했다.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정말 양가적이다. 고통에 처한 사람의 이미지를 보게 되면 보는 사람도 심적으로 고통스러워지며 뭐라도 돕고 싶다는 연민이 든다. 동시에 사진이기 때문에 실제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도 든다. 또 동시에 내가 구하지 못 했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퓰리처상 수상 사진은 너무 유명한 사진인데 사진기자는 왜 아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 먼저 찍었냐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지난 6월10일 저녁 전남 담양군 담양읍에 위치한 담양도서관에서 김 작가의 강연회가 열렸다.

김 작가는 언론인 출신이었던 만큼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책을 집필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신중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언론 산업의 내부자였다. 그걸 정확히 인지한 채 이 책이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고통을 재현한 책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윤리를 재현한 사람의 위치성 또한 대단히 윤리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저널리즘 바깥에서 문제를 꼬집거나 지적하는 태도가 아니라 한국 뉴스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온 내부자로써 책을 쓰고 싶었다. 기자들은 언론의 내부자인 동시에 뉴스의 파워 소비자이기도 하다. 나 역시 뉴스의 소비자라는 내부자로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 책이 어떤 한 사람의 그럴싸한 명함이 되기보다는 우리를 위한 질문에 정말 간곡한 초대장으로서 읽히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책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쓰여졌다.
김 작가는 스마트폰과 온라인 세대로 명명될 수 있는 요즘 세대에 대한 묘사로 강연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온라인이 일부가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다들 기본적으로 카카오톡은 다 설치되 있을 거 아닌가? 이외에도 너무 많은 SNS가 산재하고 있다. 밀레니엄, 젠지, 알파 세대는 앞선 세대로부터 온라인 행동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많이 받았다. 때로는 칭찬을 듣기도 했고 꾸중을 듣기도 했다. 이번 계엄 사태 때는 촛불 세대 2.0이라고 해가지고 엄청난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좋아요’나 ‘리트윗’ 같은 그런 기술들로 실제 행동을 대처하려고 하기 때문에 너무 피상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밖으로 나가 집회시위 등 직접 나서지 않고 온라인에서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르는 활동은 무시를 받는 것이 마땅할까? 그렇지 않다. 온라인에서의 활동도 오프라인 못지 않게 중요하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독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지와 온라인 행동에 대해 진짜 행위와 구분해가지고 비난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미지와 행동은 분리된 것일까? 이 책이 동시대에 관한 책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2025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동시에 살고 있다. 인스타 언팔이나 트위터 언팔은 사실상의 손절을 의미하고 카톡을 누군가가 안읽씹(안 읽고 무시하기)을 하면 기분이 안 좋다. 온라인 행동은 진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쉬운 비난이다. 기자들도 다 SNS를 한다. 최대한 ‘좋아요’나 ‘리트윗’을 많이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요즘 뉴스를 어디서 보는가? 다 온라인에서 본다. 요즘은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잘 없다. 뉴스를 보다가 공분이 들면 스토리에 올리고 공유한다. 데이터가 집단적으로 모이면 굉장히 큰 파괴력을 행사한다. 뉴스의 유통에도 분명 영향을 미친다.

온라인 시대의 사회적 순기능도 많다. 대표적으로 ‘온라인 청원’이 있다.
온라인 청원, 기부 인증, 이런 행동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원래 여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론조사 기관들을 동원하여 여론을 파악했다. 그러나 요즘은 여론이 눈에 보인다. 그게 전부가 되었든 일부가 되었든 우리는 날것의 여론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온라인 행동은 현대 사회에서 가지는 힘이 굉장히 크다. 물론 이 행위가 전부일 수는 없다. 하루 종일 리트윗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시민 행동은 분명히 이 사회 안에서 하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에 대한 이야기다. 퓰리처상 수상을 통해 저널리즘적 가치를 인정 받았는데, 사진 한 장으로 빈곤과 기아 문제의 심각성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켰다. 해당 사진을 촬영한 사진 기자 케빈 카터는 촬영 직후 아이를 곧바로 구출했지만, 윤리적 비판과 생활고 등에 시달리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직까지도 언론 보도의 윤리적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그런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슬픔,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의 감정은 다 비슷비슷하다. 이런 것들이 점차 사회의 변화로 이어진다. 고통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취약성의 격차가 있다. 사진에 찍힌 사람은 대단히 취약하다.
언론 보도 사진의 대상은 항상 취약하다. 그러나 그걸 만들어낸 언론인들과 뉴스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은 그렇지 않다. 일종의 ‘취약성 격차’가 생긴다.
예를 들어 불이 나가지고 막 옷도 다 챙겨 입고 나오지 못 했는데 카메라는 그걸 취재한다. 하지만 이걸 보는 우리는 옷을 다 챙겨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뉴스를 충분히 소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취약성의 격차가 현저하기 때문에 고통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를 교란시키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거리, 시간 그리고 이 고통이 얼마나 새롭고 혹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나에게 얼마나 가깝고 먼지. 이런 요소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대단히 교란시킨다. 사실 언론 산업의 딜레마다. 언론 산업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뉴스거리가 되는 것을 보도하기 때문에 참사 역시 비극성과 스토리를 쥐어짜내서 보도되곤 한다.
화제가 되는 부분이 있고 스펙타클한 부분이 있겠지만 보도물 안에는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너무 염치없겠지만 보도를 응시하되 그 안에 있는 여러 요소들을 다 생각하면서 소비를 했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더 깊게 반응하는 ‘사적 애도’는 당연한 일이다. 다만 사적 애도에 쓰는 에너지의 일부라도 ‘공적 애도’에 적절히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시민들이 많은 사회가 성숙한 공동체다.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참사와 각종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공적 애도’는 무척 중요하다.
사적 애도와 공적 애도는 존재한다. 우리가 지난 10여 년간 그것을 직접 목격을 해 왔다. 그리고 공적 애도는 반드시 필요한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죽음들이 단지 개인적으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떤 죽음은 분명히 사회적 오류로 인해서 생기고 우리가 그 죽음을 들여다봐야 이 고통과 사회적 구조를 고칠 수 있다. 예를 들어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씨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사회적 애도가 이루어진 후 다행히 김용균법이 만들어졌지만 뒤이어 안타깝게도 김충현 노동자가 사망했다. 법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제들이 계속 반복되었던 것이다. 유족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고통을 보여주면서 더 많은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을 그저 노동자 개인의 죽음으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오류를 수정할 수 없는 사회로 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