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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③] 왜 '정신 승리' 할까? 한국 사회는 "수치심과 모욕이 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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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정신 승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말을 듣습니다. 얼마 전 2년째 사용하던 무선 청소기가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겼는데 구입가의 3분의 2 정도 비용이 청구됐습니다. 배터리와 필터를 교체했으니 거의 새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데 주변에서 정신 승리를 한다며 놀리더라구요. 제게는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들 때문에 짜증과 화를 안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 승리자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큐의 정신승리법

 

지금은 정신 승리가 일상적인 용어가 됐지만 원래는 문학 비평에서 사용하던 개념입니다. 정신승리는 루쉰의 <아큐정전>에 처음 등장합니다. 소설에서 주인공 아큐가 치욕스러운 상황을 왜곡하고 유리하게 해석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모습을 보며 루쉰 작가가 붙인 용어가 정신 승리법입니다. 아큐는 동네 불량배들에게 구타를 당했지만 속수무책입니다.

 

아큐는 "아들뻘 되는 놈들과 싸우는 것은 어른스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어른이다. 그러므로 내가 대항하지 않더라도 패배하지 않은 것"이라는 식으로 정신 승리의 사고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스스로 지하실에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중년의 전직 하급 관리 A씨입니다. A씨도 아큐처럼 현실을 왜곡합니다. A씨는 늘 열등감에 시달리는데 어느 날 당구장에서 일어난 싸움에 끼어드려는 자신을 하찮게 여긴 장교에게 모욕감을 느낍니다. 장교에게 A씨는 별 의미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A씨는 당구장에서 장교가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되갚아줘야겠다는 분노심에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게됩니다. A씨는 장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그를 때려 눕히는 상상을 하지만 결국 용기가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 합니다.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가는 것으로 자신이 모욕을 갚았다고 정신 승리를 하죠.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장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 A씨의 머릿 속에서만 진행되는 서사에 불과합니다.

 

 

정신 승리는 제가 두 번째 칼럼([문명훈의 뷰 포인트②] 팬데믹이 초래한 '공격성' 우리는 왜 화를 내는가?)에서 다뤘던 긍정적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들 중 하나입니다. 부정적인 자극을 피할 수 없을 때 현실 인식을 왜곡해 자아를 지키려는 것이죠. <아큐정전>이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여기서 수치심과 모욕감 같은 파괴적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큐는 구타당하는 모욕적인 상황에서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정신 승리를 하고 A씨도 비록 상상이지만 자신을 모욕하는 장교의 행동에 맞서기 위해 정신 승리를 합니다.

 

서두에 밝혔던 제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가 봤을 때 차라리 청소기를 새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AS 센터에게 호구가 된 것일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스스로 합리적 판단도 하지 못 하고 손해를 보는 호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부끄러움을 느끼겠죠. 이때 제가 느끼는 감정은 정도는 다르겠지만 아큐와 A씨가 갖게 되는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근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정신 승리를 하며 살아갑니다.

 

수치심과 모욕감이 작동하는 방식

 

제가 정신 승리, 수치심, 모욕감 등 이러한 정서적 작용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이나 모욕은 정상적인 사회적 통념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 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비하적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이고, 모욕은 타인을 비하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다를 뿐이죠. 예전에는 아동이 이불에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오게 했다고 합니다. 창피감을 줘서라도 행동을 교정해야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키와 소금에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의미와 별개로 이 관습은 수치와 모욕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줍니다.

 

 

모든 공동체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바람직한 기준을 제시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일종의 개인들을 속박하는 인생의 가이드라인이라고 볼 수 있죠. 인서울 대학을 졸업하고, 고소득 전문직을 얻고, 그에 걸맞는 상대를 만나서 결혼하고, 서울에서 30평대 자가 주택과 수십억원의 자산을 축적하는 모습이랄까요.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면 이상적인 모습이겠죠? 방송에서는 이런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을 자주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그러한 기준들은 사회적 비교 현상을 야기합니다. 최근 드라마와 예능의 양상이 변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 합니다. 인정받는 직업을 갖지 못 한 사람, 월세나 전세로 자주 집을 옮겨 다니는 무주택자, 당장 생활비를 버는 것에 전전긍긍하는 직장인, 자의든 타의든 결혼하지 못 하고 있는 미혼 남성 등등. 이들은 알게 모르게 사회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 합니다.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동정과 걱정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서울 소재 대학은 전체 대학의 20%가 채 되지 않습니다. 전국의 자가 주택 보유율은 60% 정도입니다.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문직 종사자는 30%, 30대의 미혼율은 3~40%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제시한 정상의 기준 밖에 있습니다. 모든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는 교집합에 들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비정상과 비주류의 범위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참으로 비루합니다. 결국 한국인은 누구나 비교를 통해 스스로 수치스러움과 무시받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사회학에서는 '수치와 분노의 소용돌이(shame-rage spiral)'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평생 수치와 분노의 소용돌이 안에서 헤매고 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요?

 

 

내 부모가 누군지 알고 있냐고 묻는 뻔뻔함, 경비원을 하인처럼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속에서 돈과 직업이 인간의 존엄성을 결정한다는 계급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노력하지 않았으니 좋은 직장을 얻지 못 한 것이고", "노력하지 않았으니 좋은 집에 살지 못 하는 것이고", "무언가 부족하니까 결혼을 하지 못 한 것이다" 등등.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습관은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돼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고 습관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지고 모욕은 쉽게 전염됩니다. 익명성 때문이긴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댓글을 보면 분노와 모욕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납니다. 저는 무명의 강사에 불과한데 제가 올리는 유튜브 콘텐츠(문드로이드)에도 악플이 달리는 것을 보면 타인을 자기 잣대로 넘겨짚고 비하하는 것에서 희열과 해방감을 느끼는 보상 심리와 모욕의 문화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욕의 정치

 

정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왜 대중이 자신의 이익에 반해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에게 표를 줬는지 묻고 있습니다. 샌델은 그 배경을 두고 미국 사회에 만연한 모욕의 감정에 주목합니다. 노력과 성과가 비례할 것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의 논리는 저학력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수치심과 모욕감을 안겨줍니다. 노력이 부족해서 못 배우고 가난한 것이라는 뜻이니까요. 1980년대 이후 아메리칸 드림은 사라졌습니다. 계층 이동이 어려워지고 부가 대물림되는 상황이죠. 이런 상황에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이런 명제는 수많은 미국인들의 좌절감으로 이어집니다. 샌델은 트럼프가 사회에서 배제되고 모욕받는 이들이 갖는 무기력과 분노를 자극했고 그것이 바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말합니다. 트럼프는 비록 가짜일지라도 분노의 원인과 대상을 제시하고 원한 감정을 유도함으로써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단 미국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적 능력, 가난, 직업, 외모, 성격, 성별, 성적 취향 등 한국 사회에서도 개인들을 주눅들게 하고 스스로 비하하도록 만드는 상황들이 무지 많습니다. 수치와 모욕의 감정은 자존감 상실과 사회적 배제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파괴적인 힘은 당장 표출되지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게 작용합니다.

 

물론 개인들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인정받지 못 하고 힘들게 사는 이유는 당신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00% 틀린 말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수치와 분노의 소용돌이를 유발하는 한국 사회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아큐나 A씨처럼 비웃음을 살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비하의 감정을 견디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 승리가 만연한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프로필 사진
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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