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싶은 동기부여가 될 만큼만 읽다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면 그만 읽고 바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동진 평론가처럼 스포를 확인해도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되지 않는 타입이라면 그냥 읽어도 상관없다.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2013년 5월 이석기가 경기도 용인에서 비밀조직 RO 모임을 갖고, 남북관계 급변에 따라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대화를 나눈 것이 공개되어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박근혜 정부와 국정원은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을 대상으로 종북몰이를 자행했고 정치적 재미를 크게 봤다. 현직 국회의원이던 이석기는 국회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어 신속하게 구속됐으며 대법원에서 유죄(이적표현물 소지 및 내란선동죄로 징역 9년)가 확정됐는데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였다. 이석기와 RO 멤버들은 한반도에 비상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을 상정해서 통신시설과 유류시설 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대화를 나눴다.
그때 당시 국정원과 검찰은 이석기 일당이 국가기관을 폭력으로 점유하고 찬탈할 수도 있다고 봤던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기가 찰 일이다. 최소한 이석기 일당이 여러 정의 총기를 밀수해올 수 있는 방법을 담은 서류, 경호업체 출신 건장한 남성들을 매수해서 이들에게 쇠파이프를 쥐어주고 한 번에 습격하기로 한 작전 계획 등이 나와야 내란음모에 해당할 수 있다. 물론 그 정도로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이 실제 점령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구체성도 없는 말장난에 검찰과 국정원이 동원됐다.
내란음모를 넘어 진짜 내란 사례는 따로 있다. 리얼한 쿠데타 그 자체다. 바로 5.16 쿠데타와 12.12 쿠데타. 친위 쿠데타를 제외하고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이처럼 치밀하게 국가 권력을 물리적으로 찬탈한 사례가 없다.
지난 11월22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에는 12.12 쿠데타의 9시간(19시~4시)이 세세하게 담겨 있다. 이석기의 말장난이 아닌 진짜 내란이 무엇인지, 살벌한 쿠데타는 어떠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쿠데타의 동기는 다른 게 없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욕이었다. 메가폰을 잡은 김성수 감독은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면면과, 쿠데타를 맞닥뜨린 군인들의 군상을 보여주고 싶었으며 쿠데타를 막으려는 군인들이 꽤 있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 이전 대학가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었던 서울의 봄을 조명하지 않았다. 일반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권력 상층부의 주도권 쟁탈전이, 결과적으로 서울의 봄을 멈추게 했던 근본적인 배경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실제 역사는 그리 단선적이진 않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의 주동자 전두광(황정민 배우)과, 이를 막으려는 이태신(정우성 배우)의 투톱 대립 구도를 명확히 했다. 전두광의 실존 인물 전두환은 1979년 3월 이미 요직 중의 요직 보안사령관을 자치했을 만큼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통해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채찍과 당근을 써가며 자기 사람들을 챙기고 길들였던 전두환의 처세술은 황정민 배우의 기가 막힌 연기력으로 생생하게 재현됐다. 전두광으로 빙의한 황정민 배우의 몸짓과 말투는 능구렁이처럼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밀땅의 고수로 그려졌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12.12 쿠데타는 몇 차례 소규모 총격전을 제외하면 무력 충돌의 과정이 거의 없는 만큼 ‘우리가 더 많은 군사력을 확보했다는 정보를 상대에게 알리는 것’이 관건이었고 여기에는 전두환이 구축한 신군부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군병력을 실제로 배치시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순전히 뻥으로만 블러핑을 할 순 없다. 그래서 군병력을 실질적으로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느냐를 둘러싼 전두광의 반란군과 이태신의 진압군이 벌이는 치열한 ‘심리전’의 과정이 <서울의 봄>을 구성하는 핵심 줄기다.
<서울의 봄>에 대한 반응이 꽤 좋고 평론가들과 관객들이 대체적으로 호평을 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긴장감있고 박진감이 넘치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묘사와 연출이 돋보인다.
사실 게임은 처음부터 진압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영화와 실제 역사에서도 별 차이가 없는 포인트다. 전두광은 이미 정보 우위를 점했고, 보안사 비서실장 문일평(박훈 배우)으로부터 시시각각 진압군의 통신 정보(도청)를 보고받았다. 이태신의 발버둥은 전두광의 손바닥 위에 있던 것이나 다름 없었다. 군권만 먹으면 국가 전체를 먹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인데, 전두광은 수도권에 밀집돼 있는 군 핵심 기관(육군본부 등)을 포위할 수 있는 실병력 동원 태세를 사전에 갖춰놨다. 이를테면 이태신이 맡고 있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실병력은 예하 부대 30경비단에 1000여명 정도 있는데 그 30경비단장이 바로 전두광의 심복 장민기(안세호 배우)다. 이태신은 수경사 본부에 있는 행정병 등 비전투 병력 100여명 밖에 없는 상황에서, 특수전사령부의 공수혁(배우 정만식)과 함께 인근 부대 지휘관들에게 병력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신통치 않다. 법률적으로 상관인 이태신과 공수혁을 배반하고 전두광에게 포섭된 실병력 책임자급 대령들이 너무나 많았다.
물론 전두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만한 이태신과 공수혁의 반격 조치들이 있었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는 육본 우두머리들의 결정으로 인해 모조리 허사로 돌아갔다. 전두광의 죽마고우 노태건(배우 박해준)은 전방 9사단 병력 1000여명을 서울로 이동시키는 무리수를 감행해서라도 쿠데타를 성공시키려고 했다. 모든 걸 걸고 자신들의 야욕을 관철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반란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불리하기만 했던 진압군의 판세. <서울의 봄>은 처절했던 한밤중의 9시간을 러닝타임 141분으로 압축했다.
야 이 뇌가 썩어 빠져 문드러진 인간아. 니들이 나라 걱정을 해서 군사반란질을 하고 처자빠졌어? 니들 거기서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내가 탱크 몰고 밀고 들어가서 니들 대가리를 뭉개버릴 테니까.
이태신의 실존 인물 장태완이 부하의 회유에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는데, 실제 워딩에서 착안한 대사다. 정우성 배우는 이태신에 대해 아래와 같이 강조했다.
이태신이 절대적으로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선택이야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이태신은 군인이기 때문에 군인의 본분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거악을 물리치기 위해 정의의 히어로? 이런 거 전혀 없다. 굉장히 나약하다. 내가 현장에서도 얘기했는데 나는 앵벌이 연기를 하고 있어. 전화로 계속 사정만 하잖아. 근데 그런 어떤 무기력함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외면하고 도망가는데 어떤 사람은 그 무기력함을 뚫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이태신이다.
<서울의 봄>을 감상한 수많은 사람들의 감상평이 있겠지만 정우성 배우는, 본인의 유불리를 떠나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태신의 인간성을 보여준 것처럼 다른 선택을 한 인물들에 대한 내면 탐구가 <서울의 봄>의 취지라고 주장했다. 김성수 감독은 다른 의도를 피력했다.
2019년에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다. 그때는 신군부의 주역들 위주로 돼 있어서 그 사람들의 승리의 기록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고민스러웠다. 2020년 여름쯤에는 탐욕의 왕에 끝까지 맞섰던 장군의 모습 하나를 떠올리니까. 관객들은 이제 영화를 통해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보게 만들고 요즘 보기 힘든 전형적인 선과 악의 치열한 대립과 대결이라는 구조로 가게 되면 재밌게 보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인물을 만들었다.
선과 악을 전제해서 선을 부각하고 싶었다는 고백이다. 그렇게 기획하고 싶었던 배경이 있다. 내가 봤을 땐 김성수 감독의 의도와, 정우성 배우의 취지가 모두 담긴 영화인 것 같다.
(1990년대 중반 이후 12.12 쿠데타의 전모를 알게 됐는데) 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쉽게 우리가 무너졌나. 이렇게 쉽게 권력을 내줬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더라. 그래서 내 머릿 속으로 상상력으로 재현해보고 싶었다. 영화를 재밌게 보는 젊은 친구들의 호기심과 나의 의구심이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영화를 만들어봤다.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다.
전두광은 실존 인물이 저지른 죄악과 해악에 비해 <비상선언>의 류진석(임시완 배우), <소원>의 최종술(강성해 배우),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 배우)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얄밉다는 감정이 들게끔 묘사됐다. 악의 악랄함 보다는, 이미 끝난 게임인데도 포기하지 않는 선의 치열함이 더 중요한 영화다.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의 재현이 이렇게 스펙터클하고 박진감 넘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해보고 싶다면 꼭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