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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동안 ‘쿠데타 2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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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부터 연재되고 있는 [불편한 하루] 칼럼 시리즈 22번째 기사입니다. 윤동욱 기자가 일상 속 불편하고 까칠한 감정이 들면 글로 풀어냈던 기획이었는데요. 2024년 3월부턴 영상 칼럼으로 전환해보려고 합니다. 윤동욱 기자와 박효영 기자가 주제를 정해서 대화를 나눈 뒤 텍스트 기사와 유튜브 영상으로 전달해드리겠습니다.

 

[평범한미디어 →대담: 윤동욱·박효영 기자 / 기사 작성: 박효영 기자] 지구상에 있는 200여개 국가들 중 정상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된 경우가 별로 없다. 오히려 OECD 가입국으로 상징되는 몇몇 국가들 외에는 절반 이상이 내전과 쿠데타, 경제 실패로 신음하고 있다. 예컨대 볼리비아에서는 1825년 독립 이후 200여년간 무려 200회의 쿠데타가 벌어졌다. 매년 1회 이상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인데 그런 만큼 볼리비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볼리비아는 200년 동안 딱 40년만 민간 통치 기간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군사정권의 통제 하에 놓여있었다. 실제로 정권이 전복된 수가 190여번이나 된다.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전에 적발된 역적 모의와 실패한 반란 사례도 부지기수다.

 

 

‘12.3 계엄 사태’가 벌어지기 5개월 전 2024년 7월 한 여름에 ‘볼리비아 쿠데타史’를 주제로 <불편한 하루> 대담을 했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다. 인구는 1233만명이고 국토 면적은 대한민국의 11배다. 그러나 GDP 규모는 430억달러로 한국의 40분의 1 수준(1조 8000억 달러)이다.

 

밥 먹고 그냥 심심하면 쿠데타나 해볼까? 약간 이런 느낌이다. (by 윤동욱 기자)

 

볼리비아의 정치체제는 5년 중임 대통령제와 양원제 의회(상원 36석/하원 140석)로 구성돼 있다. 현재 집권 여당은 ‘사회주의 운동’이고 주요 야당은 ‘시민 커뮤니티’와 ‘우리는 믿는다’다. 인구는 1233만명이고, 면적은 110만 제곱킬로미터다. GDP는 430억 달러다. 대한민국과 비교해보면 영토는 10배나 더 넓지만, 인구는 5분의 1, GDP는 40분의 1에 불과하다. 남미 대륙에서도 베네수엘라를 제외하고 가장 경제가 어려운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정회민 크루가 대한민국에서 안 태어나고 볼리비아에서 태어났다면 기본 치안이 안 좋고 경제가 파탄 상태이기 때문에 무척 불행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러니까 본인이 결정하지 않은 거지만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엄청난 행운이다. (by 윤동욱 기자)

 

최악의 경제 상태는 “쿠데타 끝판왕”을 불러온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경제 실패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경제도 정치도 엉망인데 사실상 ‘내전’과도 같은 정국이 끝없이 이어졌다. 장기 독재, 경제 실패, 내전, 외국과 전쟁 등 국가적으로 비극적인 국면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최악이 내전과 전쟁이다. 치안과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것 만큼 나쁜 게 없다. 애꿎은 민간인들만 죽어나기 때문이다. 볼리비아는 엄연히 말해서 내전 중에 있지는 않지만 집권 세력이 완전한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 하면서 언제든지 새로운 세력의 쿠데타가 야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전두환이다. 5.18 진압하는 것도 그렇고 잔악무도한 독재자지만 자기 사람들 챙기고 처세를 위해서는 되게 효율적인 인간이었잖다. 그러니까 쿠데타 전략도 있는 편이었고 이 사람이 대담하기도 했고, 멍청한 부분도 있지만. 볼리비아에는 전두환처럼 세력도 꽤 모아서 강렬하고 악랄하게 쿠데타를 밀어붙여서 오래 집권한 독재자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쿠데타가 반복되면서도 특정 집권 세력이 타 세력들을 사전에 진압했으면 해당 독재가 오래 지속됐을텐데 그러지 못 했다. 독재를 어느정도 지속하려면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유연한 정책이나 경제 성장을 추진하기도 하는데 그럴 여지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볼리비아 쿠데타 역사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지능이든 정책 역량이든 군사력이든 정치적 파워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오십보백보였다. 한 마디로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쿠데타 세력이 없으니까 이모양 이꼴이 된 것이다. (by 박효영 기자)

 

안정적인 독재체제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민주화운동이 발생해서 민주체제로 갈 수도 있는데 현재 볼리비아는 안정적인 독재체제조차 들어섰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불완전한 쿠데타의 연속이었다.

 

본격적인 릴레이 쿠데타는 1825년 독립 이후 민족혁명운동당(MNR)의 등장과 쇠퇴로 인해 시작된다. MNR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MNR이 1952년 ‘국민혁명’을 성공시켜서 전국민의 지지를 받고 12년간 안정적으로 집권했는데 그 체제에 균열이 나면서 대혼란으로 접어들었다. 볼리비아는 1930년대 세계 대전 시기 남미 대륙에서 2개의 전쟁(태평양 전쟁과 차코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만큼 시민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이때 혜성 같이 나타난 MNR은 전세계에 불고 있는 맑스주의 바람을 거부했으며 민족주의를 기치로 실용 노선을 걸었다. MNR이 내세웠던 국민혁명의 골자는 볼리비아 인구의 65%를 차지하는 ‘아이마라’와 ‘케추아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과 더불어 토지개혁과 농촌계몽운동 등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볼리비아는 현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됐는데 1964년 쿠데타가 발발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레네 바리엔토스’는 군사 정변을 일으켜 MNR의 국민혁명을 중단시켰다. 특히 사회 통합의 분위기를 사그라들게 했는데 대규모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다.

 

바리엔토스의 폭정은 5년만에 막을 내렸다. 그가 헬리콥터 추락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때부터 군사 쿠데타가 밥먹듯이 일어났는데 ‘갑신정변’처럼 준비 없는 성급한 국가 전복 시도들이 빗발쳤다. 볼리비아 정국의 키를 쥐고 있는 핵심 주체는 MNR, 군부, 국민 여론, 쿠데타 세력 등이다. 특히 MNR과 군부는 혼란기에 쿠데타가 벌어져서 정국이 너무 혼탁해지면 정치적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 이번에도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를 대통령으로 옹립함으로써 바리엔토스의 공백을 메우려고 했지만 이는 패착이었다. 반세르는 군부 통치를 강화하는 것에만 골몰했다. 그러나 볼리비아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막을 수는 없었고 떠밀리듯 직선제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3차례의 선거(1978~1980년)가 열리다보니 부정선거가 횡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시적인 쿠데타와 역쿠데타 시도들이 일어났는데 드디어 볼리비아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가 등장했다. 오래 집권하지는 않았다. 1980년 7월부터 1981년 8월까지 딱 1년이었다. 메사는 그 기간 동안 학살, 고문, 정치인 살해, 경제 폭망 야기, 마약 밀매 등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메사 군사정부를 뒤엎는 또 다른 군사 쿠데타는 이내 발발했으며 1983년까지 3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다. 그러다가 MNR 개혁파에 속하는 ‘헤르난 실레스 수아소’가 1982년 10월 대통령이 되는데 이로써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뤄지게 된다. 물론 볼리비아 시민들이 4.19 혁명처럼 군부를 끌어내린 이후 민간 정부가 선거를 통해 들어선 것이 아니다. 1980년 7월 메사 정부 집권기부터 1982년까지 군사 정부의 온갖 만행으로 인해 군부 주류세력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됐다. 2가지 카드가 뭐냐면 1980년 실시된 선거 결과에 따라 실레스를 대통령으로 인정해주는 것과, 아예 새로운 선거를 실시해서 새로 뽑는 것이다. 그런데 또 선거를 치르면 부정선거를 야기할 수 있고 이로 인한 준내전급 혼란이 불보듯 뻔했다. 그래서 당선만 되고 집권하지 못 했던 실레스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도록 군부의 결단이 이뤄졌다.

 

실레스 정부는 유능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리더십이 불안했다. 장면 내각이 떠오른다. 비슷하다. 장면 내각이 실각했듯이 실레스 대통령은 보장된 임기보다 일찍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by 윤동욱 기자)

 

실레스 실각 이후에는 1985년 ‘파스 에스텐쏘로’ 대통령이 선거로 뽑혔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스텐쏘로 대통령은 볼리비아 경제를 안정화시켰고 사회통합에 기여했다. 여러 정당들의 정치활동을 보장했으며,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 볼리비아에도 봄이 오는가? 1989년 선거에서 중도좌파 ‘파스 사모라’가 당선되어 에스텐쏘로 정부의 개혁 정책을 계승하고 그 이후로는 한 동안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뤄졌다.

 

그런데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93년에 집권한 ‘산체스 데 로사다’는 극단적인 시장주의자였는데 급진적인 민영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정유, 전력, 통신 등 공공재를 외국자본에 팔아넘겼다. 시민들의 강한 반발이 불가피했는데 로사다의 진짜 의도가 인마이포켓인지 아니면 경제성장을 위한 차관을 얻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민영화 반대 여론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1997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족민주행동당(ADN) 소속 ‘우고 반세르’ 장군이 등장했다. 그러나 반세르 정부는 선거 공약과는 달리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권고를 명분 삼아 상수도 공급의 민영화를 추진하다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다. 민영화 반대 시위가 거세지자 반세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하려고 했으나 국민적 저항이 들불처럼 더 커졌다. 결국 반세르 정부는 국영화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반세르 대통령은 폐암 투병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 했다. 민영화의 화신 로사다가 부활했다. 2002년 선거에서 미국의 물밑 지원을 받아 부정선거로 당선됐는데 또 다시 외국자본에 공기업과 자원 개발권을 팔아치우다가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결국 로사다는 중도 하야했다. 민영화발 재혼란기는 여기서 마무리됐다.

 

그 이후 2005년 실시된 선거에서 사회주의운동당(MAS)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모랄레스 정부는 위태로운 공기업들을 국유화시키면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장기 집권의 초석을 만들었다. 그 기세로 3선에 성공한 모랄레스 대통령은 2019년 대선에서 부정선거 의심을 받아 대선 불복 여론에 직면했다. 불복 시위가 끊이지 않자 결국 모랄레스 대통령은 자진 사퇴했고 그 이후 법률에 따라 ‘자니네 아녜스’가 임시 대통령이 됐다. 아녜스는 모랄레스 정부의 14년 유산을 지우려고 했다. 하지만 볼리비아 유권자들은 민영화에 치를 떤다. 결국 2020년 대선에서 모랄레스 후계자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이 당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거 아는가? 가장 최근에도 쿠데타가 있었다. 쿠데타 시도이긴 한데 작년 6월29일 한국으로 치면 광화문에 탱크들이 출몰했다가 자진 철수했다. 아르세 대통령이 쿠데타군 우두머리와 직접 대면해서 군대를 철수시켰는데 자작극 의혹이 일었다. 경제 정책 실패에 따른 시민들의 원성을 모면하기 위해 일부 군인들과 짜고친 것 아니냐는 거다. 지금 볼리비아에선 가스 생산량이 줄어 수출 실적이 매우 저조한 만큼 외환보유고가 텅텅 비었다. 그래서 기름을 사오지 못 해 경제 순환이 마비됐다. 대다수 볼리비아 시민들은 역대급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미 아르세 대통령이 다시 인기를 얻기 위한 쿠데타 자작극을 벌였다는 증언도 나왔다.

 

단 번에 볼리비아 정국이 안정화되고 경제가 좋아지긴 어렵겠지만 제발 더 이상의 쿠데타와 부정선거 만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윤동욱 기자는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데 역사에 보면 항상 국민들이 강하게 목소리를 내고 집회시위에 나서는 순간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하는 군인들이 있다”면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비열한 인간들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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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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