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이내훈의 아웃사이더] 9번째 칼럼입니다. 이내훈씨는 프리랜서 만화가이자 민생당 소속 정당인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이내훈 칼럼니스트] 1985년 9월22일. 미국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프랑스/서독/영국/미국/일본) 재무장관 회의를 열고 달러 가치를 낮추는 합의를 관철시켰다. 표면적으로는 합의였지만 실상 국제 안보를 주도하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각 나라들의 화폐 가치는 상승했는데 달러는 2년간 30% 이상 급락했다. 미국은 무역 적자를 줄여서 좋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엔고 현상으로 인해 수출 부진 직격탄을 맞았다.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급히 썼다. 금리를 내리고 부동산 대출 규제를 완화했다. 훗날 돌아보면 뼈아픈 실책이었다. 부동산 거품을 겪어본 적이 없었던 만큼 거품 붕괴의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1990년 들어 일본은 또 하나의 커다란 실책을 범하는데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걷히지 않자 다짜고짜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전면 금지해버린 것이다. 당시 일본 관료들은 부동산 투기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는데 부동산 시장의 연착륙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하고 말았다. 버블은 한 순간에 꺼졌고 추락은 끝이 없었다. 건설 경기가 극심한 불황에 빠졌고, 금융기관들이 도산했고, 건실한 기업들이 무너졌으며, 일본인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버블 붕괴로 사라진 자산 규모는 1경 5000조원에 달했다. 30년이 훌쩍 흐른 현재 한국 물가로 환산해보면 4경 5000조원이다. 상상할 수 없는 규모다.
장기 불황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1980년대부터 형성된 버블이 붕괴되던 때가 1990년대 초반이었는데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20년을 넘어, 30년까지 이어졌다.
요즘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듯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무서운 일본의 경제력을 경계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지상 과제였다. 그래서 플라자 합의를 단행할 때 일본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규제도 강화했다. 그 덕분에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은 일본의 위기 동안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뤄내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2023년 기준 GDP 약 2000조원)이 됐다. 반면 일본은 잃어버린 시간으로 진입하던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계속 정체돼 있다. 그때도 지금도 일본의 GDP는 약 5000~5700조원 사이다.
언뜻 보기엔 일본 경제가 완전히 망가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2023년 말부터 닛케이 평균 주가가 33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버블 붕괴 이후 가장 높다. 세계 각국이 코로나발 양적완화로 인해 고물가로 고통 받고 있을 때, 일본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안정돼 있으며 점진적인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러 이유들이 있는데 먼저 환율 변동으로 타격을 입었던 일본 기업들은 지난 30년간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는데 현재 전체 일본 제조업의 4분의 1이 해외에 자리잡았다. 투자액은 2020년 기준 704조원에 육박한다. 내수 기업들도 변화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 대표 기업 중 하나였던 소니는 전자제품 대비 보험과 금융 비중을 높였다. 소니는 글로벌 음반사 EMI를 인수한 것으로도 모자라 비틀즈와 롤링스톤즈 등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불필요한 지출을 아끼기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왔다. 이를테면 일본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상 전철만 하더라도 안전상 문제가 없다면 굳이 교체하지 않고 30년간 운용하는 것이다. 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하고, 주력 사업에 변화를 주고, 정부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었는지 최근 들어 다시 일본이 매력적인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은 세계의 공장 라이벌 중국을 견제할 카드로 일본을 택했다. 미국 반도체 제조사들이 앞다퉈 일본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는데, 일본 정부는 투자금의 약 30%를 보조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화답했다. 예컨대 대만 TSMC만 해도 11조 5000억원을 투자했는데 일본 정부가 보조금으로 4조 7000억원을 지급할 정도다. 마이크론도 5조를 투자했고, 인텔과 IMEC도 거액을 투자할 계획이며, 삼성전자도 3000억원을 투자했다. 나아가 일본은 관광업 강국이다. 2023년만 해도 2506만명의 외국인이 일본에 방문했는데 한국의 4배 수준이다. 일본의 합계 출산율은 2022년 기준 1.26명으로 OECD 가입국 중 30위권이지만 경제 규모가 더 작은 한국이 0.78명인 것에 비하면 선방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여전히 일본을 우습게 생각한다. 과거 주권을 빼앗겼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여전히 일본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한국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선진국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것에 항의하겠지만, 앞으로도 미국이 일본해를 동해로 바꿔줄 가능성은 요원하다. 미국은 한국과도 동맹이지만 일본과도 동맹이며, 여러모로 한국보다 일본을 더 쳐준다.
사실 일본 얘기를 길게 꺼낸 것은 한국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어떤가? 고금리와 부동산 경기 침체가 맞물리며 대출금을 못 갚아서 경매로 넘어가는 부동산 매물이 급증하고 있다. 서민 물가는 치솟고 있으며, 상가마다 빈 점포가 즐비하다. 우리나라의 2024년도 예산 규모는 약 656조원이다. 작년 대비 2.8% 증가했지만 연구개발 예산은 2023년(31조 1000억원)에 비해 16.6%(25조 9000억원)나 삭감됐다. 반도체와 AI 등 갈수록 첨단 과학기술과 미래 먹거리가 중요해지는 상황인데 되려 연구개발 예산을 줄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국도 일본의 잃어버린 시간처럼 장기 불황의 시대로 진입하지 말란 법이 없다. 정치권과 학계는 물론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봐야 한다. 한국은 일본과 얽히고 설켜 있다. 일본의 극복 사례를 연구해서 배울 건 배우고, 반면교사로 삼을 건 삼아야 한다. 명심해야 한다. 위기는 기회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지 못 하면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고 언제든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