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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위패 위치'로 400년간 싸웠나? "유교는 그런 것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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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후손들 위패 불태워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한국인이라면 ‘퇴계 이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단 천원 지폐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하다. 이황은 조선 시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대학자다. 아마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한국은 유교 문화가 굉장히 뿌리 깊은 국가다. 유교는 한국인 정서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다. 당연히 이런 한국에서 유학을 논할 때 이황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다. 그만큼 이황의 가문은 지금도 대대로 명문가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살고 있다. 그런데 후손들이 이황의 위패(죽은 사람의 위를 모시는 나무 패)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다. 무슨 사연일까?

 

 

9월30일 이황의 후손들은 사당에서 소송 의식(위패 등을 불살라 버림)을 진행했다. 후손이 직접 선조의 위패를 불태우는 것은 유교 정서가 지배하는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퇴계 종가는 “무려 400년 동안이나 이어진 유림 간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400년 전이면 조선시대다. 그때부터 위패를 둘러싸고 해묵은 논쟁이 이어져왔는데 사실 유림 갈등은 현대인들 입장에서 생소할 수 있다. 거의 그들만의 리그 느낌으로 비춰질 수 있고 혹자는 “지금이 조선시대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황 위패 관련 갈등은, 후학격 인물들 중 누구를 이황 이패의 상석 즉 더 좋은 자리에 위치시킬지를 두고 벌어지는 구태의연한 다툼이다.

 

이황은 1570년 타계한 이후로 '여강서원'(경북 안동 임하면)에 모셔져 있었다. 광해군이 재임 중이던 1620년 여강서원에 이황의 두 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이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 등에 모시는 일)되면서 누구의 위패를 상석(이황의 좌측)에 둘 것인지를 두고 크게 3차례 싸웠다. 이것이 일명 '병호시비'다. 여강서원은 숙종이 재임하던 1676년 '호계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결국 김성일이 호계서원에 남게 됐고 류성룡은 병산서원(안동 풍천면)으로 가게 됐다. 시간이 흘러 안동 유림들은 김성일의 호계서원파와 류성룡의 병산서원파로 갈라졌다. 그 과정에서 1973년 이래로 댐 건설 등 여러 이유로 호계서원이 위치를 옮기게 됐는데 그때마다 호계파와 병산파간의 신경전이 이어졌고 이내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내 또 시비가 불거지곤 했다. 이러한 스토리가 지겹도록 반복돼왔고 반년 전(4월) 전통 활쏘기 시합인 '춘계 향사'가 열렀을 때는 유림들이 육탄전까지 벌여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2021년 코로나 비대면의 시대에 도무지 젊은 청년들은 이런 꼰대들의 싸움을 이해할 길이 없다. 인간은 성찰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아예 이황의 위패를 없애기로 결단하게 된 것이다.

 

이황의 15대손 이동수 안동문화원장은 지난 1일 방송된 MBC 인터뷰에서 "서원에 위패를 모셔놓고 서로 갈등이 조장되면 오히려 안 모시는 것만 못 하다"며 "우리 후손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모아서 다시 이런 논란이 없도록 하기 위해 위패를 철폐했다"고 밝혔다.

 

이황도 지하에서 후손들의 이러한 행태를 바라지 않았을텐데 이제는 좀 편안해질 수 있을까? 400년간 싸워왔기 때문에 섣불리 문제가 해결됐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위패 갈등에 주목한 이유는 후손이란 자들이 유교적 가르침을 내다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들 때문에 유교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나쁜 것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었을 만큼 유교는 한국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굳어져왔다. 가부장제와 맞물려 한국 유교는 늘 원흉 취급을 받았다. 여러 컨텐츠들에서 “유교 꼰대”로 대표되는 남성이 갓과 도포를 입고 나오곤 한다. 유교 비판론자들은 꼰대 같고 명분에만 치중한 학문 또는 생활양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현대적 관점으로 봤을 때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유교를 고리타분한 학문으로만 취급하는 것도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다. 유교는 인간이 맺고 살아가는 여러 관계들에 대한 규범을 담고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간, 부부관계, 왕과 신하 등 여러 관계들에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 등 중국의 전통 유학자들은 왕은 왕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설파했다. 관계의 본질을 정해놓은 유교가, 현대로 들어와서 욕을 먹는 이유는 상호 지켜야 할 도리를 간과한채 무조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식으로 단순하게 악용됐고 그렇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황은 당대 존경받는 유학자였다. 그러나 나이로 치면 거의 아들뻘인 고봉 기대승이 논쟁을 걸어오자 성심성의껏 편지로 답했다. 이황은 거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기대승은 30대의 젊은 선비였다. 이황은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젊은 선비의 도발에 대해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알게 모르게 인맥을 활용하여 눌러 앉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황은 그저 권위로 누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논리를 하나하나 설명해가며 정성스럽게 기대승의 주장과 질문에 반론을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대학 교수가 이제 막 석사 논문을 쓴 대학원생의 비판 제기에 성심성의껏 토론해주는 것인데 이게 핵심이다.

 

이황은 절대 자신의 권위로 기대승을 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은 학자이자 선비로서 기대승을 동등하게 대했을 뿐이었다. 나이와 선후배 관계로 아랫사람을 찍어누르는 것은 유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황은 자신의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순순히 인정했다.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 기득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자세다.

 

우리 가문의 위패를 이황 곁에 더 좋은 자리로 모셔야 한다는 따위의 아집은 유교적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이황은 윗사람의 도리된 마음으로 아랫사람의 비판적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했다. 기대승은 아랫사람의 도리된 마음으로 눈치보지 않되, 예의를 갖춰 윗사람에게 학문적 논쟁을 제기했다. 감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해? 윗사람이 격 떨어지게 왜 답변을 해줘? 이런 사고방식을 갖기 쉬웠을텐데 이황은 잘못 퍼진 유교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훌륭한 성자 옆에 우리 가문의 위패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할 게 아니라 그 성자의 가르침을 곱씹어보고 계승해서 실천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진정한 유교적 자세이다.

 

위패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명분에만 치중하는 것은 절대 이황의 가르침이 아니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찰에 숨어들게 된 조폭들이 그만 불상을 훼손하는 사고를 저지른다. 이에 화가 난 스님들은 큰스님에게 달려가 저들을 내쫓자고 건의한다. 그러자 큰스님(김인문 배우)은 “귀가 떨어졌으면 다시 붙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너네들이 섬긴 것은 부처가 아니라 그깟 나무토막이냐”라고 호통치며 스님들을 나무란다.

 

앞서 말한 것은 유교였고 이 영화는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일맥상통한다. 눈 앞에 있는 불상이나 위패의 위치 즉 물리적 형식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본질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영화에서 큰스님이 말했다시피 불상은 그저 물건이다. 그깟 나무토막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려고 진심으로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불상의 생김새나 모양이 훼손됐다고 해서 큰 일이 났다고 호들갑 떨 일이 아닌 것이다.

 

위패도 마찬가지다.

 

이황의 가르침과 정신을 진심으로 따르고 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데 있어 위패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후손들도 뒤늦게 그걸 깨달았기에 400년만에 위패를 불태웠다고 생각한다. 다만 처음부터 위패의 위치 따위로 긁어부스럼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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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안녕하세요.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입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냉철함과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겠습니다. 더불어 일상 속 불편함을 탐구하는 자세도 놓지치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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