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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명의 역사 모임 회원들에게 레고랜드 홍보? “양심 팔아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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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지난 3월25일 야심한 밤. 회원수만 241명이나 되는 역사유적 탐방 및 스터디 모임(史뿐史뿐) 채팅방에 난데없는 홍보글이 올라왔다.

 

춘천레고랜드 오픈 소식 공유. 3월26일. 세계 3대 테마파크이자 레고 러버들의 천국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가 10년만에 준공되었습니다. 3월26일 18시에 준공 행사가 진행되며 강원도와 춘천시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리며, 이렇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은 춘천레고랜드 홍보팀 직원으로 추정되는데 곧바로 탈퇴했다. 해당 역사 모임은 ‘소모임’ 앱에서 개설돼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다. 보통 소모임 모임들에서 이런 식으로 모임 참여가 아닌 홍보의 목적으로 메뚜기처럼 치고 빠지는 사람들은 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 유적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들어와서 ‘중도선사시대 유적지’를 파괴하고 지어진 레고랜드를 홍보하는 것은 누가 봐도 몰상식한 짓이다.

 

 

다음날(26일) 아침 한 회원은 “역사 모임에서 중도 유적 부순 곳을 홍보하다니 대단하구만”이라고 비판했다.

 

모임장을 맡고 있는 박진수씨도 “(레고랜드측은) 양심 팔어먹은지 오래”라고 동조했다. 이틀 뒤(28일) 진수씨는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레고랜드. 대체 제정신인가?”라며 긴 글로 레고랜드의 행태를 규탄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청동기 유적지이자 고조선판 경주시인 중도 유적지에다가 테마파크를 지었다는 것 때문에 학계를 비롯해서 저희들처럼 취미로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참 언짢고 화가 나는데 그 모임에 와서 홍보를 하다니? 제정신인가? 240명 회원들을 대체 뭘로 보고, 무슨 양심으로 홍보를 하는가. 그것도 역사 모임에서. 정말 화가 난다.

 

동시에 진수씨는 평범한미디어에 이같은 사실을 제보하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강원도 춘천의 중도동은 그야말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중도에 대해 “한반도 역사의 보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느정도냐면 그동안 중도에서 발굴된 문화유산들은 △청동기 환호(마을 둘러싼 도랑) 1기 △원삼국 환호 1기 △주거지 1423기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3090기 △지석묘(돌을 세우고 덮어놓은 선사시대의 무덤)와 같은 분묘 166기 △금 귀걸이와 토기를 합한 유물 9222점 등이 있다. 머무르고, 물건을 만들고, 경작하고, 무덤들이 있는 구역이 질서정연하게 위치해 있어서 한반도판 로마와 같이 ‘고대 계획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독일 루츠 피들러 교수(마르부르크 대학 고고학과)는 중도 유적지에 대해 “영국 스톤헨지와 페루 마추픽추 등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영국 멀린사는 한국에 ‘레고랜드 코리아’를 건설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원래는 경기도 이천과 인천광역시 등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두 결렬됐고 2011년 9월 강원도와 타전돼 중도 부지에 ‘춘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를 짓기로 결정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0.28k㎡(8만4700평)로 엄청난 규모였다.

 

레고랜드 공사 부지가 중도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시민사회와 학계 등에서 비판적인 반응이 잇따랐지만 실제로 2014년 7월 공사가 진행되던 도중 수많은 유적들이 발견되고 “한반도 최대 규모의 선사시대 유적지”로 판명된 뒤부터 반발이 거세졌다. 그럴만했던 것이 중도 유적지 자체가 “경주시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공사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던 기간이 있었는데 유적지 보존 이슈와는 별개로 부실한 사업 설계로 인한 시공사 교체, 강원도청 고위직 뇌물 스캔들 등 문제가 너무 많았다. 투자금 유치도 지지부진해서 부지 일부를 팔아서 공사 대금을 지불해야 할 정도였다.

 

중도를 옛모습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결성된 ‘중도문화연대’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레고랜드 밑에 묻혀있는데 고작 플라스틱 장난감 때문에 우리 역사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2018년 5월 강원중도개발공사 ‘엘엘개발’이 레고랜드 코리아 완공을 책임지기로 하고 돈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지난달 말에 준공이 완료된 것이다.

 

 

세계적인 관광 테마파크를 유치하는 것과 역사 유적을 보존하는 것 둘 다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후자를 희생하며 전자를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엘엘개발은 중도에 레고랜드를 조성하는 대신 2020년 12월 이전까지 선사유적공원을 건설해서 최대한 문화유산들을 보존하고 계승하기로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춘천시민사회단체네트워크 오동철 운영위원장은 춘천 MBC를 통해 “원래 레고랜드 테마파크 개장의 전제조건이 선사유적공원을 완성하는 것인데 지금 그걸 못 하고 있는 상태에서 개장 이야기를 하고 있다”며 “이건 국민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엘엘개발은 2023년 하반기부터 유적공원과 박물관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밝힌 상황이다.

 

 

강원평화경제연구소는 얼마 전 논평을 내고 “레고랜드는 시작부터 개장까지 불도저식 행정으로 이어졌다”면서 “10여년 동안 교통 대책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 한데다 시설 운영으로 얻는 임대 수익률도 3%에 불과하고 매출이 400억원 아래면 수익을 챙길 수 없는 구조라는 평가에 대해 앞으로 의혹과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금 레고랜드가 들어선 땅 아래에는 여러 유구들이 있다. 발굴된 문화재 8000점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임시로 옮겨져 있다. 역사 모임 회원들은 역사 유물들이 즐비한 유적을 뒷방으로 몰아넣은 사실 자체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모임 앞마당에서 레고랜드 홍보글까지 접했다. 진수씨의 표현처럼 “어처구니가 없고 제정신이 아닌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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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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