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한연화] 솔직히 말해서 이 사연을 읽는 내내 좀 놀랐어. 나는 분명히 당신의 사연을 처음 듣는데 듣는 내내 “내가 대체 이런 얘기를 어디서 들었더라?” 했다니까. 아니, 분명히 처음 듣는 얘기인데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거야.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당신과 당신의 여자친구의 관계를 나와 우리 큰아버지의 사이와 대조해보고는 아, 하고 웃었지만.
자취 중인 대학생인데 여친이 얼마 전 놀러와서 라면이라도 끓여달래요. 요리 재능 없어서 진짜 라면도 잘 못 끓인다. 그럴 바에 배달이나 나가서 먹자고 몇 번 말했는데 괜찮다고 했어요. 그런데 끓여주니까 물이 많다? 봉지에 써진대로 하면 되는데 이해 안 돼? 계속 그러는 거에요. 15분~20분 동안 그러길래 저도 그만하라고 내가 못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배달시켜먹자고 했지 않느냐? 그랬더니 자기가 짜증내야 하는데 오빠가 왜 짜증내냐며 다툼이 시작됐습니다. 그러고는 아직도 제가 사과 안 한다고 화나 있는데 이게 진짜 제가 사과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잘못된 놈인가 해서 물어봅니다.
<고민글 출처 : 전국대학생대나무숲 / 2021년 4월16일>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지? 당신의 고민을 들어주는 자리에서 왜 우리 큰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나 하고. 뭐, 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왜 내가 우리 큰아버지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지만 미리 말하자면 당신 여자친구의 성격은 우리 큰아버지랑 비슷해.
본론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면 내가 보기에는 이건 라면이 문제가 아니야. 당신이 라면을 맛없게 끓인 것?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보기에 당신과 여친은 그동안 서로 빌미가 없었을 뿐, 어떤 형태로든 빌미만 제공되었다면 그야말로 박터지게 싸웠을 거야. 왜냐, 둘 다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상황이 통제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거든. 그리고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상황이 통제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분풀이를 타인에게든, 자신에게든, 여하튼 어느 누군가에게 해야 하는 사람이고 말야. 다만, 그 분풀이의 형태가 서로 너무나 다르다 보니 충돌할 수밖에 없을 뿐인 거지.
일단, 당신 여친은 내가 보기에 우리 큰아버지처럼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옆에 있는 사람이 돌게 만드는 사람이야. 심지어 자기 나름의 논리까지 가지고 있으니 절대 내가 틀릴 리는 없고, 그렇다면 상대방이 틀린 것이기 때문에 그 잘못을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거지. 여친이 그 짧은 20분 동안 “물이 많다. 봉지에 써진 대로 하면 되는데 이해가 안 된다” 등등 온갖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여친한테는 당연한 거야. 남자친구가 끓여주는 라면을 얻어먹고 완벽한 저녁을 보내고 싶었는데 라면이 맛이 없어서 자신의 완벽한 저녁을 망쳤으니 잘못은 남자친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그 논리가 여친의 성격상 너무 당연해서 한 말, 또 하고 또 하며 당신을 돌게 만들었겠지.
그리고 당신은 나랑 성격이 비슷해. 나 역시 내가 통제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야 하는 사람이 맞아. 그래서 모든 변수와 가능성을 다 계산하고 살고, 그 계산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무척 불안해하지. 그리고 그 형태가 주로 짜증으로 나타나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머리로는 너무 잘 아는데,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그게 스스로 용납이 안 되니까 내 실수를 인정하지 못 하고 화를 내는 거거든. 왜냐, 모든 변수와 가능성을 계산하고 사는 만큼 스스로의 실수나 잘못이 용납이 안 되니까. 그렇다보니 당연하게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는 걸 참지 못 해. 그야 당연하잖아. 내 실수나 잘못을 잘 알지만 용납하기 어려운데 굳이 그걸 내 앞에서 상기시키는 걸 어떻게 참겠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모든 잘못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과 마주하면 어떻게 될까? 물어볼 것도 없어. 100% 싸움이 나는 거지. 당신이 여친에게 “그만해라. 내가 못 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러게 배달시켜 먹자고 하지 않았냐”고 말하며 짜증을 낸 것도 그래서야. 당신이 요리 못 하는 건 당신 스스로가 잘 알고, 당신이 요리를 못 해서 여친과의 저녁시간을 망친 것도 스스로에게 화가 날 일인데 여친이 자꾸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저녁시간을 망친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당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꾸만 당신이 요리를 못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데 당신 성격에 짜증을 안 내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어때? 여기까지 들어보니 당신과 여친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 한 눈에 들어오지? 자, 성격이 이렇게 다른데 대화법은 서로 같을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겠지? 당신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여친은 평소에도 징징거린다, 사람 피곤하게 한다 싶을 만큼 한 말을 또 하고 또 했을 거야. 자신은 절대 틀릴 일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피곤해서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을 할 정도로 스스로의 논리를 관철했겠지. 반대로 당신은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과 싸우기를 싫어했을 거야. 자신이 틀릴 가능성은 많고, 자신이 틀렸을 때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 하니 차라리 다른 사람이 멋대로 하게 놔두고 실패하는 걸 보는 게 나으나까 “그래. 그래.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라고 하고 마는 게 평소 당신의 말버릇이었을 거라고. 그런데 스스로가 틀릴 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없어서 한 말 또 하고 또 하며 스스로의 논리를 관철하는 사람은 자꾸만 내가 틀렸다는 걸 상기시키니까 “야, 너 그만 좀 해!”라고 들이받게 되는 거지.
이쯤 되면 내가 왜이렇게 잘 아는지 궁금할 거야. 말했잖아. 우리 큰아버지가 당신 여친과 비슷한 성격이고, 내가 당신과 비슷한 성격이라고. 그렇다 보니 본가에서 같이 살 때 둘이 얼마나 안 맞았나 몰라. 지금도 명절에 본가 가잖아? 하, 진짜 같이 밥을 안 먹는 게 답일 정도로 서로 안 맞아. 아니, 생각을 해봐. 한 사람은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한 사람은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어떻게 싸움이 안 나겠냐고. 내가 본가에 가서 살기가 싫은 이유 중 하나가 큰아버지랑 싸울 것이 분명해서일 정도라면 이미 말 다한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나는 당신이나 당신 여친에게 성격이나 대화법을 고치라는 얘기는 안 할 거야. 적어도 20년 넘게 같이 산 부모가 못 고쳐놓은 성격이며 대화법을 내가 어떻게 뜯어고쳐? 그건 임상심리를 전공한 전문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전문의도 못 할 영역이야. 그런데 고민상담이나 해주는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당신과 당신 여친은 그냥 서로 안 보고 사는 게 답이야. 당신과 당신 여친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절대 서로 붙여놓아서는 안 될 사람들이라고. 서로 붙어있으면 안 될 사람들이 붙어있는데 앞으로 또 싸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뿐더러 또 싸울 게 분명하니 그냥 헤어지고 보지 말고 살아. 그게 속 편해.
나처럼 가족이라서 안 보고 살 수 없고, 그래도 가족이라 미워할 수도 없고, 오히려 가족으로서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안 맞는 사람끼리 얼굴 보고 살 이유는 없잖아. 그냥 속 편하게 헤어지고 각자 갈 길을 가. 나도 고민 상담해주는 사람이지 임상심리사나 정신과전문의가 아니니까 당신의 고민에 대한 내 상담은 여기서 끝.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여친이랑 계속 보고 살면서 또 싸울지, 안 보고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지는 당신 몫이야. 알았지? 그럼 잘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길 바라며.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