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한연화] 당신의 사연은 잘 읽었어. 우선, 내가 당신에게 답변을 들려주기 위해 지금 상당히 취한 상태로 상담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시작할게. 나 역시 어떤 형태로든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라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담을 개판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리 술에 취해도 집은 찾아갈 정도의 정신으로 사는 나니까 말야.
서로 장거리였고 만난지는 200일 정도였어요. 제 시험 때문에 차였고 그 시험도 해결된 상황인데 다시 연락하면 안 되겠죠? 작년 9월에 헤어졌는데 너무 늦은 거겠죠? 다른 사람을 만나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잊겠다 다짐해서 차단해도 SNS 들락날락거리고. 잊어야겠죠. 너무 늦은 거겠죠?
<고민글 출처 : 전국대학생대나무숲 / 2019년 3월16일>
당신, 혹시 ‘올림사니’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서 나왔지. 죽은 이의 혼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의식이고, 우리를 아무 까닭없이, 이름없이 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신들과 정령들, 영혼들에게 이 사람의 혼을 받아서 황천으로 인도해달라 청하는 의식이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감을 잡기 어려울 거야. 그래, 쉽게 얘기해서 이런 거야. “태어난 모든 것은 근본에서 와서 근본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의 세계로,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산 자는 산 자대로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 남은 자들의 삶을 산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궁금하지? 대체 당신의 사연과 드라마 속 의식이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할 거고.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거야. 어쩌면 말이야, 모든 이별에는 올림사니가 필요할지도 몰라.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그 사람을 이제 떠나보내는 것을 마음 속에 담아두지 않고 이야기하고, 그동안 함께 있느라 서로 고생이 많았으니 이제 우리는 각자가 온 곳으로, 각자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고, 그곳에서 각자의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자고, 더 이상 서로를 잃은 아픔에 잠식되지 말고 그저 살아가자고 이야기하는 일이 어떤 형태의 이별에든 필요할지 몰라.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었던 말을 나누면서 서로의 앞길을 축복해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든 이별에는 필요했을지도 몰라. 그래. 그런 형태의 올림사니가 필요했을지도 몰라. 이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별 후에 살아갈 각자의 삶을 위한 어떠한 형태의 의식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사실, 내가 그랬어. 내 친구들 중 두 명이 자살했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 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코로나로 자가격리 중이라서 장례식장조차 가보지 못 했어. 그 모든 것들이, 그 모든 이별들이 아직도 내게는 가슴에 그대로 맺혀있어. 맺혀서 이대로 흘러내릴 것만 같아. 소식을 듣던 날 현실 감각이 없던 것까지도 너무 생생해서 이제 괜찮냐고 물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야. 안 괜찮다고. 괜찮을 리가 없지 않냐고.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보냈는데 내가 어떻게 내 친구들을, 할머니를, 할아버지를 보낼 수가 있겠냐고.
당신이 어떤 심정일지 이해해. 아니, 사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맞을 거야.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처럼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시험 때문에 200일 사귄 연인과 헤어져야만 했던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당신이 어떤 심정일지 이해한다고 한 건 이별할 때 마지막 인사조차 충분히 하지 못 한 그 심정을, 그래서 그 사람을 보내줄 수 없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거야. 당신의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올림사니가 필요했듯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올림사니가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한 거고.
그거 알아? 우리는 사실, 모든 이별에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없어. 저승길이 멀다 해도 대문 밖이 저승이라는 말처럼 언제 어떤 식으로 누군가와 이별을 할지 몰라. 정말 사이가 좋았던 10년 지기 절친에게서 손절을 당할 수도 있고,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오래 만나고 사랑한 연인과 헤어질 수도 있고, 어제까지 멀쩡했던 내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떠날 수도 있지. 그게 인간의 삶이니까. 끝이 있고,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숙명인 필멸자의 삶은 그런 거니까. 그런데 어떻게 모든 이별에 일일이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겠어? 또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 하는 이별에 대해 어떻게 각자의 길에서의 축복을 빌어주는 올림사니를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을 보낼 수 있겠어? 그건 불가능해. 예수라도, 부처라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못 했기에 그렇게 그 사람을 보내지 못 하고 SNS를 들락거리는 당신, 그건 당신이 이상해서가 아니야. 마지막 인사조차 못한 상태로 더는 그 사람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야. 그러니까 애써 잊으려 하지 않아도 돼. 애써 잊으려 하지 말고 당신이 그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는 걸, 그래서 보낼 수가 없다는 걸, 그 사람과의 이별에 대한 올림사니를 올릴 수가 없다는 걸 받아들여. 그러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 거야. 마음이 아픈 건, 아픈 게 맺혀서 흘러내릴 것 같은 건 그대로여도 조금은 편안해질 거야.
그리고 혹시라도 어떤 형태로든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다면, 늦게나마 올림사니를 올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함께 하는 동안 내가 많이 미안했다고, 고마웠다고, 그리고 내 곁에 있느라 고생 많았다고, 이제 그만 당신을 보내니 당신도, 나도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자고, 그렇게 서로의 길을 가는 동안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해줘. 행여 그 사람이 보지 못 한다 해도, 혹은 보고도 못 본 척 한다 해도 그렇게나마 자신만의 올림사니를 올리면 더 이상 아프지는 않을 거야. 아픔이 사라지면 온전히 슬퍼할 수도 있을 거고, 그 슬픔이 언젠가 지나면 서서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을 거야.
아, 그리고 오늘은 내가 당신에게 고맙다고 하고 싶어. 이별에 대한 사연을 가지고 와준 당신 덕에 세상의 모든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가 보내주지 못 하는 사람들, 내 친구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 지면을 통해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어.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그리고 어쩌면 내 일생 동안 그 사람들을 보내지 못 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를 상담하며 아주 조금은 내가 덜 아파질 수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이름도 모르는 내담자인 당신, 상담자인 한연화가 오늘은 뼈를 때리는 대신 슬픔과 아픔을 전하며 또한 고마움도 전할께. 당신이 가는 길에 축복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