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한연화] 우선, 당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떤 심정인지는 이해가 간다는 말부터 하고 시작할게. 일전에 비슷하다면 비슷한 사연을 상담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이런 사연에도 좀 적응이 되네. 내 적응력이 빠른 건지, 아니면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떤 사연을 맡았는지까지 굳이 당신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아무튼 요즘 이런 사연 그러니까 애인이 알고 보니 유부남, 유부녀였다는 사실 때문에 상담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상담소건 변호사 사무실이건 넘쳐나는 모양이야. 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에게 위로는 되지 못 할테니 이쯤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내가 재구성해본 당신의 상황은 대강 이래. 4개월을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 짧다면 짧은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결혼까지 생각하게 될 만큼 깊은 사이였다. 그런데 영문도 모르고 이별 통보를 받았고, 이별 통보를 받고 보니 그간 여자친구의 행적이 의아해서 구글링을 하다가 여친이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이런 상황이니 여친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당신은 여친이 유부녀라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을테니 여친이 당신을 속였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배신감 그리고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었나 싶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뒤섞여서 뭐가 먼저인지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거 아냐, 지금.
무엇보다 큰일인 건 여친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 모르고 있는지 파악할 방법 자체가 없다는 것이겠고.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 싶겠지? 그냥 술 먹고 푸념 늘어놓는 식으로 신세 한탄이나 하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훅 들어온 것 같을 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봐. 당신이 지금 겁내고 있는 게 뭔지. 당신은 분명히 ‘진짜 엎어말아 고민고민하다 체념 중인데’, ‘전번까지 바꾸고 한 거 보니 들킬 상황이거나 별거했다가 집에 남편 들어온 모양입니다’라고 했어. 스스로 한 번 생각해봐. 여친의 남편이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 아닌지 겁나는 사람이 아니면 굳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게다가 당신이 그 집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 것도 “내 여친이었던 너, 나한테 왜 그랬냐?”고 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남편이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게 너무 불안하고 답답해서 차라리 자폭하는 심정으로 내 쪽에서 모든 것을 밝히자고 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거든.
더구나 남편이 대학 병원 의사라니 변호사를 고용할 돈도 충분할테고 어쩌면 법조계에 인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불안하고 두려울 거야. 여친의 남편이 대학 병원 의사라고 굳이 강조한 걸 보면 당신은 지금 상간자 소송이 뭔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 그렇다면 내가 그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고. 일단 현재 상황에 대한 대응법만 알려줄게.
우선은 섣불리 움직이지 마. 아무리 여친이 미워도, 여친의 남편이 당신에 대해 알고 있을지 모르고 있을지 몰라 답답해도 일단 기다려. 애인이 유부남이나 유부녀인 걸 몰랐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뭔지 알아? 바로 정작 그 아내나 남편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는데 자기가 제 발 저려서 먼저 연락을 하는 거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그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당신 배우자의 불륜 상대라고 자백을 하는 거잖아. 그 자백을 들은 배우자가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아니지. 소송을 걸어서 위자료를 받아내든 익명 게시판이나 SNS에 올려서 망신을 주든 하겠지. 그러니까 여친의 남편한테는 먼저 연락이 오지 않는 한 어떠한 접촉도 하지 말고 기다려. 그렇다고 한없이 기다리라는 건 아냐. 한 반 년에서 일 년 쯤 기다려 보고 아무런 연락도 없으면 당신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살아가. 그게 현재로서는 가장 나은 방법이야.
사실, 이것 말고는 현재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나 조언은 없어. 여친이 아예 연락이 되지 않으니 여친에게 네가 유부녀인 걸 왜 속였냐, 나는 네가 유부녀인 걸 알았다면 애초에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하고 전화나 문자나 카톡 등을 통해 연락해서 사과를 받아내 혹시 모를 상간자 소송에 대비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야. 다만, 이거 하나는 할 수 있겠네. 올린 글을 그대로 캡쳐하고 URL도 저장해서 “남편이 이 상황을 알고 상간자 소송을 걸었을 때에 이것도 증거 자료로 쓸 수 있나요”라고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는 것 말야.
아, 마지막으로 당신의 신상이 익명 게시판이나 SNS를 통해 퍼진다 해도 당신은 남성이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것 참 웃긴 현실이긴 한데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유부녀가 총각과 바람을 피우면 “그러게 지 마누라 단속 좀 잘하지. 남자가 얼마나 한심하면 지 마누라를 뺏기냐”라고 자신의 소유물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 한 여자의 남편 쪽을 비난하거든. 자신의 주인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를 택한 여자를 화냥년 취급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신상이 공개된다고 해도 당신이 크게 비난받을 일은 없을 거야. 여자가 작정하고 앵기는데 남자가 어떻게 안 넘어가냐며 당신의 사연을 젊을 때 한 때의 추억담으로 여기거나 오히려 당신이 안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말이지. 그러니까 그냥 내가 하라는 것만 하고 발 닦고 잠이나 자. 그게 더 속이 편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