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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하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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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0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일기에 “미안해”라고 적었다. 남이 아닌 내 자신에게 사과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적으면서 입으로도 소리내 말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귀국이 3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 유럽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 나중에 이력에도 한 줄 넣을만한 경험이 욕심 났다. 유럽 OO 주얼리 아카데미 XX 코스 수료와 같은. 며칠간 정보를 수집한 끝에 한 주얼리 코스에 마음이 갔다.

 

 

파리까지 날아가서 한 달간 수업을 듣고 생활까지 하려면 2000유로가 더 필요하겠지만. 급하게 한식당과 K-뷰티 화장품샵을 돌며 이력서를 냈다. 독일어를 할줄 아느냐는 질문에 영어는 유창하다는 답을 할 때부터 이미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 호텔이나 호스텔 객실 청소는 독일어 쓸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친구의 말에 또 덥썩 희망을 물었다. 영문 이력서는 물론 CV(전문 이력서)라는 것도 준비해서 눈에 보이는 호텔과 호스텔 20곳에 뿌렸다. 매니저에게 잘 전달하겠다는 리셉션 직원들의 미소에 길이 열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연락을 준 곳은 한 곳도 없다.

 

귀국해서 다시 열겠다는 주얼리 공방. 어쩌면 이 모든 발버둥의 시작점인 디라이트. 지금도 매일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고 몇 주씩 고민하며 새로운 포스팅을 올려본다. 나 여기 있다고 나를 기억해달라고. 하지만 이미 지치고 바쁜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기엔 부족하다. 영세 창작자는 늘 굴복할 수밖에 없는 싸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싸움은 여전히 외롭고 패배는 쓰다. 모든 분주한 움직임들이 그날 밤 일기장 앞에 산산조각이 났다. 내게 좋은 것들을 주고 싶어 노력했지만 결국 내 손에 쥐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미안해. 능력이 부족한 나를 이해해줘.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돼. 내 최선이 이 정도야. 방법을 모르겠어. 정말 미안해. 그렇게 사과가 쏟아져 나왔다.

 

일기장 앞에서 잘못을 비는 나를 보고 마음에서 싸우던 두 자아도 잠잠해졌다. A씨(더 잘 해야 돼)와 B씨(왜 그래야 되는데?). 도전과 성장을 추구하는 얘와 게으름. 낭만과 유유자적을 추구하는 걔. 날 진짜 사랑하는 건 자기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둘 사이에 그냥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미안한데 못 하겠다고. 그렇게 나, 얘, 걔는 셋이서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울고나니 조금은 괜찮아졌다. 내 한계를 받아들이며 성숙해진 걸까? 아니면 겁쟁이가 되어 변명만 늘어가는 걸까?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과하는 나를 바라보던 그 연민의 시선을 기억하고 싶다.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 시선을 보낸 이는 얘와 걔를 뛰어넘는 사랑을 계속 보내줄 것만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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