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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비극’ 이후의 삶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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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사실 누구나 힘든 일을 겪은 뒤에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어떻게든 극복해보고 싶고 나는 이겨낼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어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이내 실패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선아 사랑해>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이지선 교수(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의 메시지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교수는 진정성있는 경험담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솔직히 나 혼자 살아남으려고 아픈 걸 참았고 그것 말고는 한 게 없는데 남을 위해서 한 게 아니다. 그냥 나 혼자만을 위해서 아픈 걸 참았다. 정말 쓸데없는 흉터들이었는데 근데 이 쓸데없는 것들이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전하는 그 통로로 작용했다. 어떤 분이 약을 먹고 있었는데 다시 살아볼 거라고 손편지들을 받을 때마다 그래 거봐. 살아남길 얼마나 잘 했어. 그날 하루 너무 너무 힘든 날 살아남길 잘 했잖아. 그분들의 편지가 내게도 너무 큰 격려가 된다.

 

 

이 교수는 작년 10월28일 19시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전일빌딩 9층 다목적강당에서 강연을 했다. 다른 목적으로 방문했던 건물이었는데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강당으로 향했다.

 

사실 석 달이 지났고 이 교수가 출간한 새 책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나온 시점 전후로 이미 너무 많은 매체들과의 인터뷰, 각종 강연 등이 넘쳐나서 굳이 평범한미디어 지면에 담아야 할까 싶었다. 그러나 이 교수가 10년 전부터 “사고를 만났다”고 표현했던 메시지의 전후 맥락이 마음에 와닿았고 꼭 그 내용을 텍스트로 자세히 기록해두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강연 하루 뒤(10월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이제부터 하나씩 소개해볼텐데 먼저 이 교수가 주목한 트라우마에 대한 부분이다. 어느 순간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용어가 됐는데 그만큼 누구나 커다란 불행과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인구 76%가 살면서 한 번쯤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한다.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이별하기도 하고 돌아가시기도 하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정말 좋은 것만 먹고 열심히 운동했지만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뜻하지 않게 큰병을 진단받기도 한다.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고에 휘말리기도 하고, 학교에서 폭력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된다. 그 일이 왜 일어났지? 외부로 향하는 화살을 쏘다가 공격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게 다시 내게 향하다가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상처 입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 교수는 트라우마만 있는 게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며 “동전의 양면”이라고 비유했다.

 

우리가 이만하면 잊어야지라고 하는데 내가 오늘 할 얘기는 스트레스와 상처, 트라우마가 주는 동전의 양면 반대쪽에 대한 것이다. 그게 바로 외상 후 성장이다. 나쁜 것들로부터 좋은 걸 이끌어내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트라우마를 통해 우리는 인생이 얼마나 예측불가능하고, 통제불가능한지 참 아픈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진실 앞에서 겸허히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교수는 고대 그리스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시를 인용했는데 “우리의 의지와는 반대로 절망 속에서도 신의 은총으로 지혜가 피어난다. 그 지혜가 바로 외상 후 성장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꽃병이 깨지면 유리조각들이 흩어지는데 이 교수는 “깨진 조각들을 보고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하고 난 뒤에 그 깨진 조각들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꽃병은 사람에 따라 “돈, 관계, 미래, 명예, 외모”일 수도 있는데 십중팔구 “누가 깬거야? 범인을 찾아보다가 결국 자기에게 화살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거기서 끝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조각들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운을 뗐다.

 

원래 꽃병의 모양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인생 여기가 끝이 아니야.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보자고 맘먹은 사람들에게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한다. 말이 좀 어려운데 의도적 반추. 자연스럽게 가만두면 우리 마음이 아팠던 일을 생각하기 싫어한다. 근데 자꾸 의도적으로 그때를 돌아보라고 한다. 너무 아프지 않는 선에서 그때를 돌아보라는 거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지? 나는 그날 이후로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상담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재해석해나가는 것이다.

 

이 교수는 외상 후 성장의 방법론으로 △의도적 반추 △정서적 노출 △타인과의 연대 등을 제시했다. 다 중요하긴 한데 그때 느꼈던 감정을 자꾸 표현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정서적 노출이 중요하다. 마음의 표현, 내가 얼마나 슬프고 무섭고 외롭고 힘들었는지 말로 잘 설명하라는 것이다. 글로 해도 좋다. 할 수 있으면 춤이나 노래로 해도 좋다. 9.11 테러 이후 조사를 해보니 마음이 잘 회복된 사람들은 감정을 잘 표현한 사람들이었다. 스피노자가 이렇게 말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하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길 멈춘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하는 순간, 더 이상 슬픔과 두려움은 그 효력을 잃어버린다. 표현하기를... 우리 한국 문화가 진짜 힘들고 남성들은 더더욱 어렵다. 저희 아버지 보며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감정을 돌아보는 걸 해보지 않았고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끊임없이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표현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연대해야 한다. 공감하고 격려하고 위로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교수는 “끊임없이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상처받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될 마음을 품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 네가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고 보내주는 그 눈빛이 하루를 버텨낼 동력이 되고 스트레스를 이겨낼 힘이 된다.

 

이 교수는 “외상을 극복하는 노력은 마음의 짐을 다시 풀고 싸는 일”이라고 비유했는데 큰 일을 당한 뒤에 우리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우겨넣은 가방”처럼 된다는 취지다.

 

잘못 건드리면 생각지도 못 한 짐이 쏟아지듯 마찬가지로 갑자기 엉뚱한 데 가서 화를 내기도 하고 분노가 쏟아진다. 근데 우리가 (가방 안에 짐을 다시 정리하듯) 준비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양말부터 꺼내서 정리해볼까? 그 사람과의 일을 꺼내서 정리해볼까? 그러다보면 그 마음들이 오늘을 괴롭히는 단기 기억 속에 있지 않고 이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는 거다. 그래서 가방의 문을 잠글 수 있다. 꼭 닫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열심히 생각하는 것, 마음을 표현하는 것, 사람들의 지지 속에 있는 걸 통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다.

 

이제 “사고를 만났다”고 표현하게 된 계기를 소개할 차례다. 이 교수는 “어느 날부터 (사고를 당했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게 불편해졌다”며 “사고를 당했다고 말할 때마다 내 자신이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라고 정의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고의 피해자로 살고 싶지 않았고 내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났다고 표현했다. 안 좋은 일이지만 사고를 만났다고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그렇게 쓰고 있었다. 만남의 결과는 헤어짐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사고와) 헤어졌다.

 

 

이 교수는 <꽤 괜찮은 해피엔딩>의 한 구절을 PPT로 띄워놓고 평온하게 낭독했다. 다 읽어갈 즈음 청중으로부터 박수가 쏟아졌다.

 

난 그날 이후의 시간을 살았다.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견뎠고 조금 더 쓰기 편한 몸을 갖기 위해 수 십차례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꿈을 꿨고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그 시간을 같이 버텨준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랑받으며 살았다. 어제를 돌아보며 슬퍼하기를 멈추고 내게 주어진 오늘을 살았다. 시간이 흐른 뒤 되돌아보니 나는 더 이상 나쁜 일이 일어난 그 시간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사고와 헤어졌다. 과거의 나쁜 일이 오늘의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으로 살게 됐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신년 인사로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거나 “원하는 일 모두 이뤘으면 좋겠다”고 하는 문장들이 불편해졌다. 따지고보면 아무 의미없이 툭 튀어나오는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도 그리 좋은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니 비현실적이다. 인생이라는 게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허지웅 작가가 “원래 인생은 빡치는 것을 참아내고 버텨내는 것”이라고 설파했듯이 복으로 가득찬 인생이나 좋은 일만 가득한 인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교수는 그런 덕담을 건네기 보단 힘든 일이 찾아오더라도 잘 극복해낼 수 있도록 다른 이야기를 해주자고 제안했다.

 

나쁜 일이 안 일어나길 바라고, 우리 모두 꽃길만 걸어가라고 많이 말해주지만.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삶이 끝나지 않았고 그 일과 잘 헤어질 수 있다. 잘 헤어질 수 있길 바라고 혼자가 아니란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외상 후 성장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현재진행형이다. 이 교수는 이를 “여행”에 빗댔는데 “나 역시 여전히 여행 중”이라고 말했다.

 

어제까지는 아니었다가 오늘 짠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오늘 내 모습에 가망이 없는데? 실망할 필요가 없다. 긴 여행으로 계속 성장할 것이다. 오늘 내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 긴 여행으로 계속 성장할 것이다. 오늘 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필요가 없고 괜찮은 방향으로 계속 갈 수 있길 바란다.

 

인생은 ‘긴 여행’이자 ‘마라톤’이다. 흔한 비유인데 이 교수는 실제로 마라톤을 경험해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꼴찌나 다름없지만 7시간이란 기록으로 마라톤 완주를 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정말 너무너무 그만두고 싶고 진짜 더 가면 죽을 것 같은 고비들이 있었는데 근데 죽을 것 같았지만 죽는 게 아니었다. 끝까지 왔는데 잘 살아 있었다. 결코 이 레이스가 날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그만두지 않는 한 이 레이스는 계속되는 거구나. 나와 여러분에게 각자의 마라톤이 주어졌다. 지금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인생이란 마라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교수의 삶을 보고 한 번쯤 가졌을 궁금증이 있다. 재심 전문 변호사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는 이날 현장에 참석해서 강연을 경청했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가해자에 대한 원망”에 대해 물었다. 이 교수는 “가해자에 대해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이 축복”이었다고 답했다.

 

그 당시에 우리 가족은 그것까진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었다. 망각은 신의 선물인데 누군가 질문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됐다. 사실 가해자가 있고 이렇게 나는 고통스러운데 누군가 있단 걸 기억한다는 게, 누군가를 원망하고 그러는 게 벅찬 일이다. 나는 그때 생존에만 초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잊어버림의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를 나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사람에 대한 긍휼함을 내 마음 안에 품었는데 내가 진짜 큰그릇이라서가 아니라 나는 친구 만나서 뒷담화도 하고 욕도 잘 하고 되게 보통 사람인데. 내가 그 당시 갖고 있던 짐의 무게는 그것(가해자에 대한 분노심)까진 버틸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당시 하루종일 감사할 것을 찾는 게 그게 내 삶의 태도였다. 그렇게 오늘 내내 이야기한 외상 후 성장으로 떠나는 시작이 됐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모두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건넸다.

 

죽을 것 같은 고비를 한 번 만났다고 해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라는 그런 보장도 없다. 어려운 일들을 만나면서 살아가고 그런 고비를 만나더라도 그만두지 말았으면 좋겠고 좀 쉬어가면 좋겠다. 옆에 있는 사람들, 응원하는 사람들의 힘도 받아가면서 다시 살아가면 좋겠다. (마라톤에서) 꼴찌해도 너무 좋았고 너무 행복했다. 언젠가 내 인생의 끝에서 내 삶의 사명을 다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마무리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인생을 잘 살아나가길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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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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