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3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직전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윤 기자는 내게 귀국 후 계획을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생각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중요한 질문이었으니까. 공방을 지속하리라 믿었던 부모와 고객의 기대를 배반한 뒷감당이 두려웠다. 하지만 소명으로 여겼던 주얼리 일이 내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 같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였다. 커다란 빗자루로 모든 것을 내 삶에서 쓸어내 버렸을 때 무엇이 남을까. 그래서 2023년 겨울 계약이 종료된 공방에서 가구를 혼자 정리하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사라진 것들이 슬펐고 뒷감당이 무서웠지만 미치도록 홀가분했다. 그래서 울다가 웃었다. 길고 긴 여행이 끝난 뒤 배반의 대가는 실체를 드러냈다. 살려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일을 해야 했다. 과거 출강했던 곳들에 먼저 전화를 돌렸다. 누군가 전화를 받으면 미리 메모장에 적어둔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그들의 미지근한 반응이 내 말을 끊기 전에 적어도 준비한 말은 다 전하고 싶었으니까. 새 공방 자리도 알아보고 있다. 예산에 만만한 매물들은 대
※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2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1482. 수백대의 중고차가 전시된 드넓은 공터에 이런 번호판이 붙어있는 것은 운명이 내게 보내는 강력한 신호였다. 그와 나의 핸드폰 번호 맨 뒷자리인 14와 82가 나란히 적힌 차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남색이었고 그가 원하던 내비게이션 옵션도 달려있었다. 이 차를 만났을 때 나는 한정된 예산과 뭔가 애매한 중고차들 사이를 돌아다니느라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 차를 보았다. 그리고 이 우연의 의미를 해석하려 애썼다. 상상 속으로 써내려가던 그와 내가 천생연분라는 소설에 꼭 필요한 아름다운 사건. 나는 강력하게 이 차를 추천했다. 그리고 우리는 운명의 1482차를 타고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엄청 많은 우연의 일치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가 나를 떠났을 때 신비로운 우연들로 써내려간 내 상상 속 소설이 정말 ‘소설’이 되어버렸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요즘 금속공예 수업을 듣고 있다. 학생들의 연령대는 다양한데 어느날 중년의 동료가 쉬는 시간에 ‘점’을 보고 왔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점쟁이가 그녀의 음력 생일이 남편의 양력 생일과 똑같아서 그녀의 말년운
※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1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기차에서 내려 나와 똑같은 까만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역에 발을 내디뎠다. 1년 3개월만이었다. 모두가 다른 특징을 가진 유럽에서 모두가 비슷한 특징을 가진 한국으로 나는 그렇게 돌아왔다. 지하철로 환승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자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과 층수를 셀 수 없는 고층 빌딩이 나를 반겼다. 와 사람 참 많다. 지하철역엔 사람들 뿐 아니라 광고로 꽉 차 있다는 것도 처음 느꼈다. 오스트리아 빈의 지하철역엔 움직이는 영상들이 없고, 커다란 연예인 광고판도 없다. 하지만 서울의 지하철에는 눈을 두는 곳마다 광고들이 어떻게든 내게 말을 걸려고 안달나 있었다. 눈을 감았다. 하늘이 파랗고 조용하고 느리고 연예인이 없는 빈이 벌써 그리웠다. 서울 지하철 1호선에서 운 좋게 앉아 가던 내게 백발의 여성이 다가왔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나는 한 정거장이면 내려. 아유. 얼굴도 예쁜 아가씨가 마음도 곱네. 고마워요. 마음 속 딱딱했던 무언가가 그녀의 온기에 녹아 내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한국은 이렇게 따뜻한 곳이 아니었을까? 내가
※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0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3주 뒤면 유럽을 떠나야할 슬픈 운명은 내 여행욕에 계속 불을 지폈다. 지금 여기서만 가능한 모든 걸 경험해야 해. 뭘 해야 할까? 이왕이면 그럴 듯한 성과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해볼까 아니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경험을 해볼까. 참 나다운 고민이었다. 그렇게 난 듀크 대공의 바로크진주 예술품을 떠올렸다. 두 개의 커다란 바로크진주로 잠자고 있는 아기를 표현한 걸작. 공방 수업에서 소개할 때마다 고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던 작품이었다. 아! 주얼리를 공부하러 ‘또’ 이탈리아에 가는 거군. 그런 이유라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리 정신나간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챗 GPT로 열띤 사전 조사를 마친 뒤 피렌체에 도착했다. 일기예보와 다르게 비가 내렸고 시내버스 막차는 내가 서있는 정류장을 그냥 지나쳤다. 이탈리아 유명 주얼리를 다 씹어먹고 오겠다는 내 자신만만한 선언을 들었던 룸메이트가 보면 놀릴 게 분명했다. 폰 화면에 맺히는 빗방울을 소매로 계속 닦으며 구글맵으로 숙소까지의 거리를 확인했다. 걸어서 40분. 휴! 이튿날 눈에 불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9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부다페스트에서 돌아오던 밤은 몹시 추웠다. 국제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몸이 덜덜 떨렸다. 추위는 지하철역까지 나를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역 안의 온도도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웅크린 채 시내로 들어가는 지하철을 기다렸다. 그런 내 옆에 엄마와 아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Nein, Nein, Nein!!!!” (아냐, 아냐, 싫어!) 싫다는 딸을 엄마는 이리저리 달래가며 양손엔 털장갑을 끼우고 이미 쓰고 있던 털모자는 쭉 당겨 귀를 완전히 덮고 열려있던 재킷의 지퍼는 목 끝까지 끌어 올려 무장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품에서 놓아줬다. 나도 저런 보호를 받던 때가 있었지. 추워서일까. 혼자만의 여행이 끝나고 좀 외로웠던 걸까. 저런 타인의 간섭이 그리웠다. 분명 가방에 장갑을 넣었었는데. 배낭에 쌓인 여행 짐을 파헤쳐 밑에 깔린 장갑을 발견했다. 장갑을 끼며 생각했다. 나는 어른이니까.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고. 어른. 어릴 땐 주민등록증이 생기면 자동으로 되는 건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되는 건가
#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8번째 글입니다. 조은비 대표님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은비 대표님의 자세한 서사를 만나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d_light_heals_u)에 방문해보길 바랍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빈 숙소 앞엔 마당이 있고, 커다란 나무가 있다. 독특한 중부 유럽의 나무를 뭐라고 부르는지 전혀 몰랐기에 내 멋대로 은행나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큰 나무들은 다 은행나무였으니까. 가을이 되고 수많은 밤들이 마당에 떨어져 있는 걸 본 뒤에야 그들의 정체가 밤나무라는 걸 깨달았다. 산속에만 사는 줄 알았던 밤나무가 이웃일 줄이야. 여름엔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풍성하게 자란 나뭇잎을 만질 수 있었고, 매일 아침 동틀 무렵엔 새들이 나무에서 노래 경연도 벌였다. 그 후 가을엔 밤이 주렁주렁 열렸고, 1층에는 “먹을 수 있으니 누구나 가져가세요”라고 쓰여진 간판이 붙었다. 그렇게 변덕스럽게 모습을 바꾸던
#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7번째 글입니다. 조은비 대표님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은비 대표님의 자세한 서사를 만나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d_light_heals_u)에 방문해보길 바랍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사람에겐 두 개의 고향이 있다고 한다. 태어난 고향과 마음의 고향. 그렇다면 베를린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전세계 유명 브랜드가 모인 쇼핑몰을 놔두고, 사람들은 정작 빈티지숍에서 옷을 사는 도시. 베를린 필하모닉을 보유한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의 도시이면서, 수술 자국이 선명한 가슴을 드러낸 트랜스젠더 남성의 공연 포스터가 붙어있는 도시. 도시 전체를 편리하게 연결하는 두 종류의 지하철, 트램, 버스가 있지만 거기서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거나 전자담배를 피는 도시. 소시지로 만든 ‘커리 부르스트’와 돼지고기로 만든 ‘슈바인스학세’가 유명하지만 식료품점 가격표엔 비건(동물성 재료가 전혀 없는) 정보를 크
#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6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파리 첫 날이었다. 아침 8시30분 보베 공항 활주로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머릿속 파리지앵의 이미지에 부응하려 새벽부터 공들인 메이크업과 고데기한 머리는 시작부터 망가졌다. 위축된 상태로 파리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가방에서 캡모자를 꺼내 쓰며 망가진 머리도 애써 가려보았다. 하지만 2시간 후 파리 <샤를 드골 에투알역>에 내렸을 때 내가 본 진짜 파리지앵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백팩을 맨 채 우산도 없이 비 내리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렇게 나는 의도치않게 파리에 완벽히 스며들어 있었다. 평범한 뒷골목에 숨겨진 작은 비스트로에서 첫 끼니를 먹었다. 1년간의 오스트리아 생활로 돈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유명 맛집들을 제외하고 택한 곳이었다. 구글맵으로 파리 중심가와 떨어진 지역들을 줌인
#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5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사브리나는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준 첫 오스트리아인 친구였다. 서구 영화에 보면 저녁 식사를 초대하는 것의 의미가 남다르던데 고심 끝에 한국을 대표하는 참이슬 2병과 오스트리아 전통 생강 쿠키 렙쿠헨을 선물로 준비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처음이지만 이미 몇 번은 와본 것처럼 아늑하고 편안했던 사브리나 가족의 아파트. 한 쪽 벽을 장식한 오스트리아 국기도, 방문에 붙은 커다란 비엔나 지도도, 한국의 차가운 형광등과 다른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편안하게 만든 건 좋은 친구의 환영이었다. 케이팝을 배경음악으로 선곡한 사브리나의 귀여운 배려가 이방인으로 실수를 저지르진 않을까 긴장했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줬다. 오븐에 구운 야채와 연어로 저녁식사를 마친 뒤 사브리나는 보여줄게 있다며 앨범들
#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4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20대에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서러웠다. 혼자 있는 나는 뭔가 부족한 반쪽짜리였다. 그래서 나는 온전히 ‘현재’를 나만 생각하며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과거의 누군가를 원망하느라 ‘과거’에 살았고, 만나지도 않은 다음 상대를 기다리며 불확실한 ‘미래’에 살았다, 그렇게 즐기고 누리지 못 한 현재가 쌓여 돌이킬 수 없게 되면 또다시 후회하며 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내가 밉지 않다고 말해줄 타인이 다시 필요했다. 아주 지독한 악순환이었다. 언제부터 왜 반쪽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걸까? 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 걸까? 너무 이른 나이에 독립해서? 아니면 호르몬 불균형? 원인의 실마리를 풀어보려 노력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지금은 혼자가 좋다. 올해 10월은 대단하진 않지만 내게는 인생의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