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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도 ‘명절 스트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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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5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사브리나는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준 첫 오스트리아인 친구였다. 서구 영화에 보면 저녁 식사를 초대하는 것의 의미가 남다르던데 고심 끝에 한국을 대표하는 참이슬 2병과 오스트리아 전통 생강 쿠키 렙쿠헨을 선물로 준비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처음이지만 이미 몇 번은 와본 것처럼 아늑하고 편안했던 사브리나 가족의 아파트. 한 쪽 벽을 장식한 오스트리아 국기도, 방문에 붙은 커다란 비엔나 지도도, 한국의 차가운 형광등과 다른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편안하게 만든 건 좋은 친구의 환영이었다. 케이팝을 배경음악으로 선곡한 사브리나의 귀여운 배려가 이방인으로 실수를 저지르진 않을까 긴장했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줬다. 오븐에 구운 야채와 연어로 저녁식사를 마친 뒤 사브리나는 보여줄게 있다며 앨범들을 한아름 꺼내 왔다. 첫 번째는 크리스마스 앨범. 그녀의 엄마가 매년 새로운 장식을 사서 공들여 꾸민다는 생나무 트리. 그 아래 가득한 모형이 아닌 진짜 선물들. 그리고 매년 바뀌는 트리들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앳된 사브리나까지.

 

너무 아름답다! 근데 난 크리스마스 별로 안 좋아했어. 친척 집을 방문해야 하고, 선물에 돈도 꽤 써야 하니까. 다같이 모여 전통 음식을 만들다가 각자 만들고 싶은 전통 음식이 달라서 자주 싸우는 것도 스트레스였어.

 

오스트리아에도 명절 스트레스가 있다니. 오스트리아인들에게도 가족은 든든한 울타리이면서도 말하지 못 할 사연이 가득한 집단인 것 같았다. 한국도 명절에 전통 음식을 만들다가 싸우냐는 그녀의 질문에, 한국에선 명절 때문에 이혼하고 살인도 벌어진다고 말해주려다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참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다시 사브리나는 크리스마스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딸, 남편, 사브리나 이렇게 셋이서 새로운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사브리나표> 전통은 대략 이렇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브리나 가족이 함께 트리를 만들고,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각자 한 해를 돌아보는 기도를 하는 것.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많은 전통들이 사실 근대 이후 만들어진 허상임을 지적하지 않았던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명절을 위해, 전통은 함께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눠 더 행복하게 바꿔나갈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는 결혼 앨범이다. 앨범은 웨딩드레스를 막 입기 전 케이크를 ‘퍼’먹고 있는 사브리나의 사진으로 시작되었다. 결혼식이 아닌 웨딩드레스를 고르러 갈 때도 ‘예비신부 다이어트’를 하는 한국에서 온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몸매가 신경쓰이지 않았어? 나도 예쁘게 보이고 싶었지. 근데 도저히 에너지가 딸려 안 되겠더라고.

 

그 다음은 한국의 올리브영 같은 오스트리아의 매장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사브리나와 웨딩드레스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리를 넣고 있는 그녀. 본식은 한 관공서의 강당에서 이뤄졌는데 공무원이 혼인 계약서를 읽고 신랑과 신부가 그 서류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법 앞에서 부부가 된 둘은 관공서 옆 교회로 이동해 신 앞에서 한 번 더 사랑을 맹세했다. 다음으로는 식사가 제공되는 피로연. 사브리나와 남편은 두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맞추는 게임의 MC가 되어 정답을 맞춘 하객들에게 경품을 주었다. 마지막 순서는 애프터 파티. 술에 진탕 취해 무아지경 몸을 흔들고 있는 둘의 모습. 그렇게 새벽 5시까지 이어진 뒤풀이. 이 결혼식은 부부가 된 둘 뿐만 아니라 참가한 하객들도 평생 잊지 못 할 기억이 될 것 같았다.

 

엄청난 지출이었어. 결혼식에 1만유로나 썼으니까. 이 모든 걸 계획하느라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고.

 

퇴근하고 합류한 남편 플로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1시간 조금 넘는 결혼식에 평균 3000만원을 쓰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준비했다면 사브리나는 식을 올릴 수 있었을까? 그녀가 직접 온라인으로 만들어 주문했다는 결혼 앨범을 보며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앨범은 임신과 출산 앨범. 만삭의 사브리나와 다른 이유로 커다란 그녀의 아빠가 서로 배의 크기를 겨루는 사진에 한참을 웃었다.

 

자신의 행복들을 앨범에 기록해온 사브리나. 그 기억을 석달째 우정을 맺고 있는 새내기 친구에게도 보여줘서 영광이었다. 우리의 수다는 늦은 밤에 끝났다. 사브리나와 따뜻하게 포옹을 나눈 뒤 12월1일 그녀의 생일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밖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여기가 한 나라의 수도인 대도시라는 게 다시 한 번 놀라웠던 순간. 오스트리아는 참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라다. 사브리나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문화에 대해 배우고 삶에서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한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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