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8번째 글입니다. 조은비 대표님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은비 대표님의 자세한 서사를 만나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d_light_heals_u)에 방문해보길 바랍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빈 숙소 앞엔 마당이 있고, 커다란 나무가 있다. 독특한 중부 유럽의 나무를 뭐라고 부르는지 전혀 몰랐기에 내 멋대로 은행나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큰 나무들은 다 은행나무였으니까. 가을이 되고 수많은 밤들이 마당에 떨어져 있는 걸 본 뒤에야 그들의 정체가 밤나무라는 걸 깨달았다. 산속에만 사는 줄 알았던 밤나무가 이웃일 줄이야. 여름엔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풍성하게 자란 나뭇잎을 만질 수 있었고, 매일 아침 동틀 무렵엔 새들이 나무에서 노래 경연도 벌였다. 그 후 가을엔 밤이 주렁주렁 열렸고, 1층에는 “먹을 수 있으니 누구나 가져가세요”라고 쓰여진 간판이 붙었다. 그렇게 변덕스럽게 모습을 바꾸던 밤나무는 지금은 나뭇잎도, 새도, 밤도 없이 고요하고 외롭게 서 있었다.
그때 나는 마당에서 중고거래 구매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도시의 중심가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순간이었다. 때마침 눈도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귀한 곳이라 뜻밖의 행운에 기분이 좋아졌다. 눈을 맞으며 밤나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무 줄기엔 버텨온 세월을 증명하듯 커다란 나무껍질이 잔뜩 붙어있었다. 손으로 만져봤고 차갑고 딱딱한 그 결을 느꼈다. 그리고 커다란 줄기와 어울리지 않은 작은 가지도 자세히 보았다. 거기엔 놀랍게도 분홍빛을 머금은 봉오리가 올라와 있었다.
영하 3도의 날씨에 죽어 있는 것 같던 밤나무는 부활할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땅속 깊은 뿌리부터 힘을 짜내 저 윗부분까지 싹을 틔워낼 것이다. 싹은 커다란 나뭇잎이 되고, 애벌레가 그 잎들을 갉아 먹은 후 날개를 달고 다른 세상으로 날아갈 것이다. 여러 종류의 새들도 찾아와 노래 경연을 벌이겠지. 가을이 되면 또 다시 밤도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하지만 또 나무는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모두 버릴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자신이 나무라는 건 절대 잊지 않는. 그래서 다시 변화무쌍한 주변의 온도, 햇살, 바람, 비에 적응하며 새싹을, 잎을, 밤을, 그러다가 다시 모든 걸 버리는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만약 내가 이 나무 같다면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누구에게 속해있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부질없는 생각에 미련 갖지 말고. 살아갈수록 쌓여가는 기억을 끌어안고 이 기억을 ‘성취’라 생각하며. 힘든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건, 내가 가진 것들을 잃는 것이라며 두려워했던 익숙한 나날들로 인해 고통스러웠다. 변화로 인한 결과를 끊임없이 예측하려 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정신을 좀먹었던 나였다. 그래서 불행한 현재를 바꾸기 어려웠다. 그리고 내겐 힘이 없다며 사는 게 원래 그런 거라며 우울해하곤 했다.
그때 팔기로 한 물건은 친구에게 선물 받은 이젤이었다. 이 커다란 이젤을 한국까지 들고 갈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 저렴하게 팔기로 했다. 중고거래 전날 밤엔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아 잠도 설쳤다. 다시 누군가에게 이젤을 받을 수 있을까. 함께 미술관을 다니며 6시간씩 회화 작품을 봐도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고, 미술관 정원에서 간식을 나눠 먹으며 끝없이 농담을 나눌 수 있을까. 내가 회화 작품을 보며 언제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는 걸 또 알아봐 줄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이젤을 한국까지 들고 갈 수 없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밤나무 아래에서 만난 구매자는 이젤을 마음에 들어 하며 사 갔다. 팔아버린 이젤이 밤나무의 밤 같다고 생각했다. 나무가 때가 되어 떨어뜨린 밤이 여러 동물의 좋은 먹거리가 되듯. 내가 빈에 놔두고 간 이젤이 구매자의 삶에 행복이 되길 바랐다. 이젤을 팔고 난 후 나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커다란 이젤이 사라지며 방에 공간도 생겼다. 내 마음에도 미련을 버린 후 공간이 생긴 것 같았다. 다시 소중한 무언가로 채워질 곳. 남은 한 달 동안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처분하며 이 공간을 키워가고 싶다.
창밖의 밤나무를 바라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1년 내내 모습을 바꿔가며 최선을 다해 만들었던 자신의 과거를 모두 버린 내 이웃. 저 나무처럼 때가 되면 불필요한 것 원하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릴 줄 아는 지혜를 간직하고 싶다. 나는 여행을 사랑하고 언제나 새로운 모험을 꿈꾸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에겐 가볍게 짐을 꾸리는 기술이 필수다. 하지만 여전히... 여전히... 어렵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했다는 기억. 그 기억에 딸린 감정에 내가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항상 내 가장 가까이에서 몸소 삶의 지혜를 보여준 저 이웃을 잊지 않고 싶다. 때가 되면 품고 때가 되면 놓는 것. 그리고 내가 모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잊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