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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할머니가 “얼굴의 점 빼라”고 말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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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1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기차에서 내려 나와 똑같은 까만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역에 발을 내디뎠다. 1년 3개월만이었다. 모두가 다른 특징을 가진 유럽에서 모두가 비슷한 특징을 가진 한국으로 나는 그렇게 돌아왔다. 지하철로 환승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자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과 층수를 셀 수 없는 고층 빌딩이 나를 반겼다.

 

와 사람 참 많다.

 

지하철역엔 사람들 뿐 아니라 광고로 꽉 차 있다는 것도 처음 느꼈다. 오스트리아 빈의 지하철역엔 움직이는 영상들이 없고, 커다란 연예인 광고판도 없다. 하지만 서울의 지하철에는 눈을 두는 곳마다 광고들이 어떻게든 내게 말을 걸려고 안달나 있었다. 눈을 감았다. 하늘이 파랗고 조용하고 느리고 연예인이 없는 빈이 벌써 그리웠다. 서울 지하철 1호선에서 운 좋게 앉아 가던 내게 백발의 여성이 다가왔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나는 한 정거장이면 내려. 아유. 얼굴도 예쁜 아가씨가 마음도 곱네. 고마워요.

 

 

마음 속 딱딱했던 무언가가 그녀의 온기에 녹아 내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한국은 이렇게 따뜻한 곳이 아니었을까? 내가 너무 오랜만에 서울에 와서 모든 게 낯설어서 그래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한 건 아닐.....까. 그 순간!

 

근데 얼굴에 그 점은 빼야겠다.

 

그녀는 내 볼에 있는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튕겨내는 손짓을 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어폰을 빼야 들리지.

 

그런 말을 들으려고 베푼 친절이 아니었다. 그녀의 짧은 몇 마디에 정말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의 문화가 모두 농축돼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외모를 지적하는 ‘외모 강박’.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 권력’. 특히 여성의 외모를 둘러싼 그 질긴 ‘혐오(Misogyny)’.

 

나는 얼굴에 있는 점이 좋다. 물론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한국에서 얼굴에 있는 점을 사랑하는 건 마치 발톱의 때를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니까. 어른들이 그랬다. 대학에 가면 얼굴에 있는 점들부터 빼버리라고. 그래서 수능이 끝나자마자 피부과에 가서 얼굴에 있는 모든 점들을 레이저로 지졌다.

 

아유. 은비는 등에 큰 점이 있어서 안 되겠네.

 

왼쪽 날개뼈 쪽에 있던 엄지 손톱만한 점은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로 없앴다. 엄밀히 말하면 사라지진 않았다. 아직도 그 자리에 수술 자국이 남아있으니까. 점과 수술 자국. 무엇이 더 좋은 걸까? 그리고 몇 번의 레이저 시술에도 그녀가 가리킨 왼쪽 볼에 있는 이 점은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러다 우연히 <나 혼자 산다>에서 마마무 ‘화사’가 직접 화장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특이하게 메이크업으로 가려진 자신의 점들을 다시 아이라이너로 선명하게 그렸다. 메이크업으로 다 덮은 얼굴보다 그게 더 예뻐보였다. 그때부터 점 빼는 걸 멈췄다. 그리고 나도 아이라이너로 여러 번의 레이저로 옅어진 이 점을 칠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게 뭐가 예쁘냐고 당장 빼버리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왠지 이 점을 지키고 싶었다. 우주에 닿을 듯 높은 한국의 미적 기준에 대한 ‘저항’이랄까. 그리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내 저항은 다시 익숙한 압력에 부딪혔다.

 

 

‘결점 없는(Flawless) 뱀파이어’. 오스트리아 친구들은 한국 연예인의 얼굴을 뱀파이어에 자주 비유했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표백된 피부, 극단적으로 마른 체형 등등 그런 미적 기준들이 수많은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세뇌되어 평범한 여성에게도 가해지는 구조. 이 족쇄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그날 서울역에는 역시 표백된 피부에 극단적으로 마른 팔로 스프라이트를 들고 있는 에스파 윈터가 있었다. 작년 여름 빈의 한 역 앞에는 조금 다른 광고가 건물 전체를 래핑했던 때가 있었다. <Sexy, Not sorry>라는 광고였다. 광고에선 내 등에 있던 점만한 크기의 까만 자국이 어깨에 있는 통통한 여성이 란제리를 입고 등장한다.

 

내 몸에 대해 안 미안해. 나는 존나 섹시해.

 

외모 강박을 부추기는 광고가 붙는 사회와, 저런 광고가 붙는 사회는 완전히 다르게 여성을 바라볼 것이다. 한국이 정말 달라지면 좋겠다.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 특히 여성 자살율 1위. 20~30대 여성들의 자살율이 최근 몇 년 간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사실. 그들이 느꼈을 수많은 압박 중엔 뱀파이어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도 작용했으리라 믿는다. 친절의 대가로 엿본 내 나라의 모습이 씁쓸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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