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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이 아니라 야당과 ‘협상’을 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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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12월3일 이후 모든 국민들이 하루종일 뉴스앱을 들여다보는 상황이 됐다. 8년만의 데자뷔다. 원래 뉴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일상을 계엄 정국 소식들이 채우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미디어 멤버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지난 6일 평범한미디어 크루로 활동하고 있는 박성준 센터장(다소니자립생활센터)이 업무 단톡방에 아래와 같이 제안을 했다.

 

4년 중임제든 정치 구조 변화 관련 기사나 유튜브 컨텐츠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이번 계기로 대통령 중임제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져야 한다.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제의 틀을 벗어나서 사고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중간 단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권력구조 개헌이 바로 임기 4년 대통령 중임제와 결선투표제 도입이다. 일찌감치 박 센터장과 박효영 기자는 한국 정치의 제도 개혁에 관하여 의견 일치를 봤다. 그래서 지금 이 시국에 무슨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느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제도권 언론들이 속보를 쏟아내고 있는 만큼 평범한미디어까지 똑같은 내용으로 다뤄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윤석열 대통령 개인이 “미치광이”라서 그 사람만 제거해버리면 한국 정치가 다시는 이런 비극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물론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차원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구속이 시급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100% 동의한다. 이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하지만 탄핵과 구속이 이뤄진 이후에 조기 대선의 구도로 모든 이슈가 빨려들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평범한미디어라도 이런 이야기를 지금 꺼내보고 싶다. 

 

 

12일 오후 박 센터장과 한 번 더 전화 인터뷰를 했다. 비상 계엄 선포 직후였던 3일 23시 이후 9일만이었다. 박 센터장은 “지금 일주일 넘게 지났는데 일주일 내내 뉴스만 보느라 일상이 완전 뉴스로 도배되고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전국민의) 일상을 그렇게 망쳐놓고도 아직도 망칠 일이 남았는지 오늘도 헛소리를 하더라”고 한탄했다. 윤 대통령은 45년 전 12.12 쿠데타가 있었던 이날 오전 180도 태도를 바꿔서 변명 담화문을 발표했다.

 

지금 야당은 비상계엄 선포가 내란죄에 해당한다며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습니다. (중략) 대통령의 헌법적 결단이자 통치행위가 어떻게 내란이 될 수 있습니까?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권 행사는 사면권 행사, 외교권 행사와 같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야당은 저를 중범죄자로 몰면서, 당장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30분을 할애해서 야당의 문제점을 성토했는데 계엄 선포만 하지 않았다면 어느정도 언론과 국민의 공감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2일까지만 해도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과 개별 검사들을 탄핵하고, 대대적으로 정부 예산안을 삭감한 것에 대해 비판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모든 무리수를 계엄이 뒤덮어버렸다. 윤 대통령은 계엄이 아니라 민주당 규탄 성명을 내고, 물밑에서 여야 정치 협상을 주도해서 난국을 풀어갔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윤석열 정부 집권 내내 윤 대통령의 거부권과 검찰 수사권, 야당의 탄핵권과 예산심의권이 팽팽한 ‘치킨 게임’ 구도를 만들었고 여야의 타협과 협치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아무래도 4.10 총선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점점 민주당의 의석수 파워에 윤 대통령이 쪼그라드는 국면이 형성됐음에도, 윤 대통령은 정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엄 카드를 써서라도 모든 걸 반전시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박 센터장은 “그러니까 윤 대통령은 여전히 당당하고 항상 쟤들이 잘못했지 뭐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총선 끝나고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불러 면전에서 쓴소리를 경청했는데 그런 자리를 좀 더 자주 만들어서 정치적 해법을 모색했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채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에 더불어 명태균 게이트까지 겹쳤고 윤 대통령은 야당의 강력 공세들을 상대하다 대야당 적개심을 점점 키워갔다.

 

숙일줄 모른다. 그러니까 국회에서 야당이 거의 200석 가까이 있는 건데 이 정도면 윤석열 정부가 국정을 운영하는 게 어려우니까 좀 협조를 받아야 되는데. 예를 들어 위기가 생길 때만 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기자회견을 자주 하고 야당과도 적극적으로 만나고 소통을 해야 하는데 적개심을 키우면서 점점 야당과 국회를 인정을 안 하게 된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전부터 몇번 예고했던대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인물인데 뭘 보여줄지 가늠이 안 된다. 보여줄 걸 다 보여준 것 같은데...

 

윤 대통령의 고집과는 달리 야당과 협치를 잘했던 지도자가 바로 故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 대통령은 임기말 헌정 사상 최초로 대권 후보들을 청와대로 초대해서 정책 논의를 할 정도로 남다른 협치력을 보여줬다. 김 대통령은 임기 내내 굵직한 갈등 현안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청와대로 불렀다. 그냥 이벤트성으로 부른 게 아니었다. 빈손으로 끝난 적은 거의 없었고 대타협의 결과물이 뒤따랐다. 예컨대 1999년 3월17일 이 총재가 4개월만에 다시 청와대에 방문했는데 무려 3시간 동안 김 대통령과 1대 1로 격론을 벌였다. 청와대를 나와 기자들과 만난 이 총재는 만족감을 드러냈다. 논의 테이블에 올라갔던 의제들만 하더라도 정치개혁 입법과 권력구조 문제, 국정원 사찰, 특검 도입, 남북관계, 한일 어업협정, 국민연금 시행, 3.30 재보궐 선거 등등 무엇 하나 간단치 않은 게 없었지만 김 대통령은 야당 당수와 정면돌파를 택해 문제를 풀어냈다. 그 결과 6개항 합의문이 도출됐다.

 

김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야당과 가장 활발하게 소통한 대통령이었는데 총 여덟번이나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가졌다. 연 1.5회 반년에 한 번씩 야당 당수를 만난 셈이다. 한나라당이 김대중 정부를 매섭게 공격하지 않아서 만남이 성사된 게 아니었다. 야당의 대여 네거티브가 강렬하더라도, 의약 분업 이슈와 IMF 외환위기 대처 등 반드시 해법을 찾아야 할 의제들이 많았고 제1야당과의 협력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故 노무현 대통령도 대연정 카드를 제안하는 등 야당과의 협치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쳐오며 점점 더 여야 소통의 수준이 악화일로가 됐다. 문재인 정부 역시 협치 점수가 좋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반기에 한 번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가 청와대에서 회동하는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가 있었고, 국회에서도 국회의장과 여야 지도부가 정례적으로 만나는 ‘주례 회동’과 ‘초월회’가 살아있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재명 대표가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고,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등 상호 저주하고 분노를 쏟아내는 패턴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김건희 리스크와 이재명 리스크는 서로 공격하기 좋은 상수였으며, 현안들이 발생할 때마다 감정이 상할대로 상한 상태에서 네거티브를 구사했기 때문에 더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원래 정치라는 게 싸우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 본질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비생산적일 필요가 없다. 그동안 우리 국회는 1990년대 이후 ‘동물 국회’였다가 2012년 국회 선진화법이 통과되고 ‘식물 국회’로 전락했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소위 180석 대승을 거두기 전까지의 국회 의사결정 패턴은, 쟁점 이슈 하나가 부각되면 수많은 무쟁점 이슈들이 논의되지 못 하도록 올스톱되는 일이 빈번했다. 강성 야당은 언제든지 국회를 박차고 나가 장외투쟁 카드를 선택했다. 그러다가 민주당이 두 번 연속 총선(2020년과 2024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자 패스트트랙 카드를 쓰지 않아도 본회의까지 단독으로 안건을 상정해서 의결할 수 있는 권능을 갖게 됐다.

 

2019년 ‘조국 사태’ 이후 등장한 대권 주자 윤석열은 또 다시 대선에서 패배할 수 없는 국민의힘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져 대통령직을 차지하게 됐는데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탄생 배경 자체부터 파괴적인 갈등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었다. 민주당은 사실상 국회 의석 3분의 2를 차지한 상태에서 윤석열 정부에 대한 탄핵과 특검의 고삐를 최대치로 쥐었고, 그럴수록 윤 대통령은 거부권과 검찰 수사권에 더욱더 의존하게 됐다. 윤석열 정부 탄생 이후 한국 정치는 한 마디로 ‘거부권과 탄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원래 국회 임기 4년과 대통령 임기 5년간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것이 거부권과 탄핵이다. 어떻게 대통령이 국회에서 통과된 안건을 거부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야당이 여권에 인사 교체 요구를 하지 않고 무턱대고 탄핵부터 들이미는가? 그렇게 민주화 이후 30년 넘는 시간 동안 한국 정치는 ‘거부권과 탄핵’으로 상징되는 괴물로 변해있었다.

 

정치 시스템 자체가 문제다. 선거제도와 권력구조를 손봐야 하는데 서로 맞물려있는 대업이다. 그동안 정치 개혁의 움직임은 있어왔지만 여야 이해관계 앞에 항상 좌절됐다. 분명한 것은 국회 구성과 대통령 선택을 승자독식 선거제도로 결정하는 시스템 하에서는 최소한의 협치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1표만 더 얻어도 모든 걸 다 가져가는 지역구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대량의 사표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야당은 무조건 여당과 대통령을 공격하는 정치 전술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상대를 흠집내서 반사이익을 누리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야당이 강하게 나오기 때문에 여당은 무조건 대통령을 옹호하기 바쁘다. 적대감을 부추기는 정치 토양 아래에서는 좋은 정치인이 등장하기 어렵고 상대를 악마화해서 제거하려는 강성 정치인들이 득세하기 쉽다.

 

결론적으로 이번 계엄 사태는 지도자 개인의 ‘미친짓’으로 퉁치면 안 된다. 오히려 한국 정치의 파산으로 받아들여야 그 다음을 모색할 수 있다. 관련하여 2018년 겨울 선거법 개정 패스트트랙 정국의 초입에서 정의당 이정미 전 대표가 바른미래당 손학규 전 대표와 단식을 이어오다 양당의 합의문을 이끌어내며 아래와 같이 발언을 했는데 의미가 있어 발췌해본다.

 

나는 한국 정치의 악마가 민주당도 한국당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치의 악마는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대결 정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가는 길은 그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 모두가 사는 길이다. 정책과 의견대로 국민께 평가받고 지지받고 이것을 토대로 토론하고 합의하는 생산적인 정치를 만들게 될 것이다. 24살의 김용균 청년 노동자가 사망했다. 지금 죽음의 외주화를 멈출 수 있는 많은 법안들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그런데 논의조차 되지 못 했다. 온 국민의 애도 물결은 넘쳐나는데 왜 국회는 그런 국민의 뜻을 받들어 법안을 처리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드시 실행해야 할 또 하나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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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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