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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만 쪼들리는 도시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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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4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칼럼니스트] 런던 여행을 다녀왔다.

 

(1) 런던은 서울만큼 빨랐다. 그래서 비엔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덩치 큰 강아지도, 엄마도, 아빠도, 아기도 없었다. 빠르게 내 옆을 지나가는 차들은 자꾸 긴장하게 만들었다. 횡단보도에 있는 신호등은 10초도 안 돼서 빨간불로 바뀌었는데 그마저도 신호등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녹색불로 영영 바뀌지도 않았다. 실제 런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내 걸음 속도도 빨라졌다. 주변을 둘러보기보다 앞만 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만 걷게 된다. 런던 사람들도 치열하게 사는구나. 하긴 런던의 미친 물가를 보면 납득이 되었다. 지하철 한 번 타는데 5000원이나 드는 나라니까.

 

 

(2) 런던의 유명 식료품점 체인점들엔 다 ‘밀딜(Meal deal)’이라는 코너가 있다. 메인 음식+음료+스낵 구성의 상품 묶음을 말하는 것으로 제일 싼 묶음이 3.5파운드(6000원)이고 가장 비싼 게 9파운드(1만5500원)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상품 수가 가장 많고 빨리 동이 나는 쪽은 역시 3.5파운드 코너다. 조합을 잘 하면 영양도 챙기고, 지출도 아낄 수 있어 인기가 높다. 나 또한 여행 내내 밀딜을 챙겨 먹었다. 런던에서는 어디나 식당에 들어가면 서비스 요금이 붙는다. 흔한 캐주얼 다이닝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서비스 요금이 12.9%까지 붙어 기본 25파운드(4만3000원)가 넘어갔다. 미친 런던 물가를 실감했다. 밀딜은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식료품점 입구마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는 음식을 자율적으로 기부 받는 공간도 있다. 식료품점 입구에는 노숙자들도 많다. 화려하게 빛나는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 런던의 이면은 숨 막히게 쪼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3) 여행 내내 원화 가치 급락에 자주 좌절했다. 10년 전 런던을 여행할 때만 해도 파운드화는 유로화보다 비쌌다. 1파운드가 1400원이 넘는다며 투덜거렸는데 지금은 1700원이 넘는다.환전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나라가 더 힘이 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기가 죽어 있는데 꺾여진 내 기를 살려주는 건 대영박물관 입구에 걸린 대문짝만한 삼성 디지털 교육 센터 홍보 현수막이었다. 삼성문화재단의 힘으로 중국관, 일본관 옆에 한국관도 있었고 대한항공의 후원으로 생긴 한국어 가이드도 여전히 운영 중이었다. 한국이 싫어서, 서울이 싫어서 힘들어한 적도 많았는데 이럴 때는 묘하게 국뽕이 느껴졌다. 그래도 내 나라가 잘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위상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런던은 내게 많은 배움 만큼 깊은 한숨도 많이 안겨준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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