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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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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이내훈의 아웃사이더] 27번째 기사입니다. 이내훈씨는 프리랜서 만화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주로 비양당 제3지대 정당에서 정치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민생당 소속으로 최고위원과 수석대변인을 맡고 있습니다. 이내훈의 아웃사이더는 텍스트 칼럼 또는 전화 인터뷰 기사로 진행됩니다.

 

[평범한미디어 이내훈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제정 헌법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통령은 원래 국회의원들이 뽑는 간선제였다. 당연히 국민이 뽑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 아웃사이더에서는 정부 수립 직후 제헌 헌법이 수립된 정치적 배경과, 이승만이 왜 강력한 대통령제를 차용하게 됐는지 그 속사정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말을 해보고 싶다.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하면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각각 점령하는 형태였다. 이러한 군정 통치는 3년간 이어졌는데 우리나라는 좌우익과 중도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이 거셌다. 소위 해방 정국이다. 결국 UN은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거한 자유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는데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이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 했고, 남한 지역에서는 1948년 5월10일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을 차지해 1당이 됐고, 한국민주당은 29석을 얻어 2당이 됐다. 1당의 지도자였던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이 됐고 약 2개월간 재임했다. 이승만 의장 주도 하에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는 제헌 헌법이 만들어졌는데, 그 직후 7월20일 아이러니하게도 국회에서 선출된 초대 대통령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런데 대통령 선출로 끝난 게 아니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는 5.10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남로당 무장세력이 경찰지서 12군데를 습격했고, 반대급부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뒤이어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벌어져 동족상잔의 비극이 초래됐다.

 

곡절 깊은 한국 현대사가 한창인 와중 이승만은 자유주의자로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하였지만 민주적으로 정부를 운영하지 않았다. 6.25 직전 치러진 2대 총선(1950년 5월30일)에서 이승만 정부와 정부여당은 혹독한 정권 심판을 당했다. 반민특위 무산 및 김구 암살에 대한 책임론이 거셌던 만큼 여권(대한국민당+대한독립촉성국민회)은 총원 210석 가운데 고작 38석을 얻는데 그쳤다. 정당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한 것이지만 무소속이 무려 126석 60%나 됐다. 정당정치의 개념조차 설익었었고 이념 갈등까지 더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는데 그렇게 2대 국회가 개원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으로 피난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소환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소위 ‘발췌 개헌’을 통과시켰다. 골자는 총리 권한을 축소하고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다. 국민의 대통령 선출권이 보장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더 하고 싶은 이승만이 국회 여론과 무관하게 권력욕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었다. 당시 제1야당 민주국민당은 줄기차게 내각책임제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발췌개헌은 혼란스런 정국 수습을 위한 방안이었다는 데 공감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이후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까지 벌어져 헌정 사상 최초의 독재자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없었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을 계승하려는 정신은 현행 헌법 전문에 기재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본래 국민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1904년 저술한 ‘독립정신’과 필라델피아에 소집된 ‘대한인총대표회’ 결의문을 보면 “정부는 백성이 하는 것, 백성으로 된 것, 백성을 위해 세운 것” 등 링컨의 민주주의 3대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다만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와 정부, 행정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정국에서 당파성은 자제해야 하며, 최소 10년간 정당 활동이 없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일례로 그는 1945년 10월 기자회견에서 “개인은 3000만을 구성하는 한 분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 한 분자는 전체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현명한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조국 해방을 위해 앞장서면서도 현실주의자로서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고 하지만 필자는 간혹 그때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물론 비현실적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한반도는 이념의 전쟁터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자유진영 인사들이 활약하지 않아서 노선이 달라졌더라면, 한반도는 북한 주도 적화통일이 됐을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북한은 석탄 등 풍부한 지하 자원을 바탕으로 공업기술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정국 대는 문맹률이 높았고 국민의 정치 의식 역시 지금과 달랐다. 그래서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제는 권력욕이 강한 이승만에게 선택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문맹률은커녕 국민의 정치 의식과 교육 수준이 평균적으로 높아졌다. 정치 무관심층도 있지만 여의도 소식이 밥상머리에 오를 만큼 가장 핫한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마인드는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선거 전략으로 한쪽의 이념에 편승해 상대를 깔아뭉개는데 그 목적은 결국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이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아래와 같이 발언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정부의 지나친 규제를 비판한 발언이라지만 오래 회자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표 떨어질까봐 문제가 곪을 때까지 방치하는 정치, 스스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이념의 전사처럼 행동하는 정치, 도덕적으로야 어쨌든 인기만 많으면 뭐든 괜찮다는 몰염치한 정치, 어느 나라 정치라고 안 그러겠냐만은 우리나라는 유독 심하다. 만년 4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최근 개헌 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정치 세력마다 목적은 다르겠지만 방향은 대체로 권력 분점과 대결 정치의 완화를 표방한다. 지금까지는 강력한 대통령이 국정을 홀로 이끌어가고 국회에서 야당이 죽기살기로 반대해왔는 앞으로는 달라야 한다. 과거에 그래왔다는 사실만으로 현행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다. 급변하는 대내외적인 환경에 맞지 않는 낡은 정치를 언제까지 그대로 둘 순 없다. 개헌의 방향을 잘 세우고 대국민 설득 작업을 잘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 22대 국회는 시작부터 원구성협상 등 파행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개헌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한다면 성공적인 국회로 평가받을 수 있다. 늦지 않게 논의를 시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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