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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경제개발론’ 제대로 살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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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이내훈의 아웃사이더] 29번째 기사입니다. 이내훈씨는 프리랜서 만화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주로 비양당 제3지대 정당에서 정치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민생당 소속으로 최고위원과 수석대변인을 맡고 있습니다. 이내훈의 아웃사이더는 텍스트 칼럼 또는 전화 인터뷰 기사로 진행됩니다.

 

[평범한미디어 이내훈 칼럼니스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대한민국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 전쟁으로 국토 전체가 초토화되어 국민들이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정치 세력들은 매우 어지럽게 갈등만 반복하고 있었고, 명목상 집권하고 있던 장면 내각은 대처 능력이 부족했다.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장면 내각이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전혀 잠재우지 못 하자, 박정희 소장과 3000여명의 군인은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렇게 권좌에 오른 박 대통령은 1979년 10.26 사태로 타계할 때까지 무려 18년간 독재를 했다.

 

 

박정희 집권기는 유신헌법 공포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 시대는 경제 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결단으로 좋게 평가되는 반면, 이후 시대는 권력을 사유화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한 측면이 압도적으로 부각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때로 돌아가보자.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 성공 이후 9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던 1962년 3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쿠데타로 인해 1년 반 넘게 유지되었던 계엄령이 1962년 12월 해제됐으며, 1963년 1월에는 정치 세력들의 정치 활동이 허용됐다. 5.16 쿠데타의 집행부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개헌을 단행하고 선거법과 정당법을 고쳤는데 골자는 내각제 폐기와 대통령 중심제로의 회귀다. 그렇게 박 대통령은 1963년 10월15일 치러진 5대 대선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서 42.6%(470만표)를 얻어, 민정당 윤보선 후보(41.2%)를 제치고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됐다. 5대 대선이 끝나고 곧바로 실시된 6대 총선에서는 전체 175석 중 민주공화당이 110석을, 민정당이 40석을 차지했다. 박 대통령은 쿠데타 이후 민주적 형식을 갖추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한 셈이다. 박 대통령은 1962년 신년사에서 아래와 같이 발언했다.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확고한 경제적 기반 없인 실현을 바라기 어렵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 개발론에 무게를 뒀는데, 동시에 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 합리화의 속내가 자리잡고 있다.

 

어찌됐든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박정희식 경제 개발의 내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정치인 박정희를 악마화하지 않고 빛과 어둠 중 빛의 측면을 면밀히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박 대통령은 경제 개발에 사활을 거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스스로도 어느정도 진심으로 경제 개발을 성취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절대 권좌에 올랐던 독재자로서 박 대통령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으며, 동시에 경제 개발의 방향을 설정할 소프트웨어까지 나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원’이다. 박 대통령은 부흥부, 재무부, 내무부에 있던 여러 경제 관련 부처들을 통합해서 경제기획원을 만들었다. 경제기획원장의 서열은 국무총리 다음으로 높았다. 확실히 힘을 실어준 것인데 장기적인 관점으로 국가 경제를 설계할 수 있도록 했다. 경제기획원이 없었다면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프로세스는 매우 더뎠을 것이다. 경제기획원은 1994년까지 존속될 정도로 민주화 이후 어느정도 기능과 역할을 인정받았다. 한국개발원은 경제 정책을 연구하는 조직으로서 1971년 3월에 만들어졌는데, 박 대통령은 외국에 거주하는 학자들을 대거 초빙해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줬다. 군사독재기에 수많은 계획들이 폭력적으로 추진됐음에도 크게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이 바로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원의 조타수 기능 덕분이었다.

 

나아가 박 대통령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수출입은행 등을 설립해 우리나라 산업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끌어올렸다.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을 중시했던 것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다.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에 발을 빼려는 기조(닉슨 독트린)로 인해 박정희 정부의 위기감이 컸는데 심지어 주한 미군 일부가 철수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체 군수용품 생산시설을 갖춰야 했던 절실함이 있었는데, 남북 군사적 긴장관계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군사적 하드웨어가 취약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1973년 포항제철소가 완공되는 등 그 이후로 대한민국은 철강, 조선, 자동차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핵심 요소는 누가 뭐래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당시 야당이 결사반대를 하는 가운데 전문가 집단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막강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이자 완공에 다다랐다.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 경제 개발의 토대이자 젖줄이 되었다. 만약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한국은 개발도상국 신분을 탈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탈출했더라도 곱절 가량 늦어졌을 것이다.

 

빛과 어둠 중 어둠의 그림자도 짙었다. 너무나 빨리 앞만 보고 달려왔던 만큼 부작용이 간단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 하에서 노동 여건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 했다. 극단적인 임금 체불과 최악의 근로환경이 상수였다. 경제 개발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묵인해주는 한국적 분위기가 횡행했다.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전태일의 희생 이후로도 노동 환경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한국 경제는 계층별 양극화로 신음하는 체제가 깊게 뿌리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를 위해 정치적 권리를 억압했던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중앙정보부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받게 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은 사형이 확정되고 단 하루만에 집행되었는데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1975년 4월9일)로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경제 개발론이 만능이라고 해도 박정희 정부의 정치 탄압은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결국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부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다투던 참모들의 갈등 정국 속에서 박 대통령은 부하의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정치인 박정희 만큼 공과가 뚜렷하게 나뉘는 인물은 한국 현대사에서 찾기 드물다. 그래서 사후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호남 지역이 분류되고, 두 거대 정당이 분류되고 있다. 생각의 다름이 발전적으로 작용해서 좋게 귀결되면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못 한 것이 현실이다. 참으로 씁쓸하다. 선거 때마다 무덤에 있는 박 대통령을 꺼내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하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으며, 국민 여론 지형 역시 비생산적인 국론 분열로 치닫곤 한다. 앞으로는 박 대통령에 대해 화두가 떠오르면 적이냐 아군이냐가 아니라, 공과를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론장이 형성됐으면 좋겠다. 그런 시민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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