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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군사독재 ‘전두환 정부’에 대한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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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이내훈의 아웃사이더] 30번째 기사입니다. 이내훈씨는 프리랜서 만화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주로 비양당 제3지대 정당에서 정치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민생당 소속으로 최고위원과 수석대변인을 맡고 있습니다. 이내훈의 아웃사이더는 텍스트 칼럼 또는 전화 인터뷰 기사로 진행됩니다.

 

[평범한미디어 이내훈 칼럼니스트]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전두환이다. 전두환의 온갖 악행들로 인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전두환의 발자취를 짚어보고 싶었다. 다들 알고 있는 익숙한 5공 정권의 탄생기를 처음부터 살펴보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빈틈을 치고 올라온 것은 전두환 소장. 10.26 사태에 대한 수사권을 쥐고 있던 전두환 소장(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979년 12월12일 포스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려 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 국군 집단간에 충돌이 벌어졌는데 전두환 집단이 승리했다. 이들이 바로 ‘신군부’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생생하게 봤던 그 과정을 떠올려보면 된다. 신군부는 군사 반란에 성공했지만 미국의 추인을 바로 받진 못 했다. 따라서 최규하 대통령 대행 체제를 즉시 부정하지 못 했다. 그럼에도 대세는 넘어갔던 상황이라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8월 하야하게 됐고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직을 차지하게 됐다.

 

전두환 체제가 들어설 당시 정당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여당 민주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사분오열되어 정치적 존재감이 전무했다. 야당 신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주도권 다툼이 극심했던 터라 신군부의 야욕을 저지할 수 없었다. 1980년 5월15일에는 학생들이 신군부에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벌였는데 그 당시 심재철 서울대학생회장의 주도로 시위를 중단하고 잠시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다. 그러자 신군부는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전국계엄과 부분계엄의 결정적 차이)하고 공포 정치를 자행했다. 국회의사당을 군 병력이 점령했고, 김종필과 김대중 등 정치인들은 보안사로 연행되었으며,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탄압의 절정은 광주였다. 비상계엄 확대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의 평화로운 시위를 신군부가 잔인하게 진압한 것이다. 집단 발포 등에 따른 동료 시민들의 학살 피해를 목도한 광주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항거했다.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적군을 처단하듯 광주시민들을 학살했다. 만행의 연속이었다. 계엄령에 의한 언론 통제는 철저했고 광주의 비극은 뒤늦게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오월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결국 이것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촉발시켰다.

 

전두환은 7년 단임제의 대통령직에 취임하면서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결여된 정권의 정당성을 무력만으론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군부는 여당 민주정의당 외에 관제 야당들(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을 창당해서 마치 다당제를 유지하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었다. 1981년에 치러진 11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은 총 276석 중 151석, 민주한국당은 81석, 한국국민당은 25석을 차지했는데 주요 야당 신민당의 핵심 리더들이 나서지 못 하게 조치(정치활동금지법)를 취한 이후 관제 야당의 떡고물을 실현시켜준 결과다. 물론 1985년 총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이 67석을 얻으며 돌풍을 일으켰는데, 신군부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반감이 주효했다. 민주정의당은 148석을 유지했으나 두 관제 야당이 폭망했다. 신한민주당은 사실상 관제 야당에게 갔던 표를 흡수했고 강력한 야당으로 떠올랐다. 5공 정권의 아성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났던 건데 그때부터 신한민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이 하야하고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 한국 현대사의 마지막 군사독재 세력이었던 전두환 정부는 노태우 정부로 이어졌지만, 결국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평화로운 정권 이양과 안정적인 정권 교체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체제로 굳어졌다.

 

다시 돌아와서 전두환 정부의 명과 암을 보려고 하는데 일단 경제 성과부터 들여다보자.

 

5공이 권력을 쥐고 있던 1980년대의 대한민국은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전두환은 1도 모르는 경제 정책에 대해선 김재익(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사실상 전권을 위임했다. 시기적으로 경제성장의 포텐셜이 발현되고 있던 만큼, 김재익을 컨트롤타워로 두고 있는 전두환 정부는 지속적으로 관세를 낮추고 수입 자유화 품목을 늘렸다. 또한 외국 자본에 대한 은행 투자를 늘리고 규제를 풀어 자본시장을 직접 통제 방식에서 간접 규제로 전환했다. 1981년에는 공정거래위원회를 발족했고, 이듬해엔 ‘중소기업진흥 장기 10개년 계획’을 세워 추진하기도 했다. 그 결과 중소기업들이 많이 늘어났고 고용률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모든 통신사업자가 수입의 3%를 의무적으로 연구개발비로 쓰도록 한 결과 연간 700~800억원이 통신사업개발비로 재투자됐다. 통신 강국이 될 수 있는 뼈대가 형성된 셈이다. 1981년과 1982년에는 올림픽을 유치했고, 프로스포츠를 창설했다. 또한 의료보험을 전국민 대상으로 확대했고, 국민연금과 최저임금제 등을 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사회 정책으로도 이런 것들이 있었다. 대학 입학시험이 폐지되고 통금이 해제되었다. 과외를 금지시켰고, 정부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해 공무원 수를 줄였다.

 

전두환 정부의 명이 있더라도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정부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노동자를 억압한 군사독재 정치 세력임이 틀림 없다. 전두환 정부의 경제 성과 역시 기본적으로 거시경제를 구성하는 자본가와 엘리트 계급을 중심으로 채워졌다. 전두환은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사회정화위원회’를 발족해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폭력배 등 범죄자들을 강제 입소시켜 표면적으론 사회 안정을 꾀하면서 각종 정치사회적 불만을 억제하는 데 이용했다. 그런데 삼청교육대 입소자 중에는 불량배 말고도 정치범이나 사회운동가 또는 일반 시민까지 있었는데 사회적 저항을 억압할 목적이었다.

 

전두환은 정권의 정당성이 결여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공포를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부정부패가 극심했는데, 나중에 법원이 전두환에 대해 인정한 추징금만 2205억에 달할 정도이니, 실제 부정 수뢰 규모는 훨씬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두환이 사리사욕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국민을 억압한 결과는 1987년 6월항쟁으로 돌아와 마침내 우리나라는 1972년 유신헌법 이후 다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게 된다.

 

흔히들 전두환을 학살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필자는 전두환만이 학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롭지 못 한 방법으로 사익을 취하고 이를 위해 타인을 탄압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실행하는 일들은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전두환이 잠시나마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 공동체 저변에 이기심이 깊고 넓게 드리워진 배경이 작용했던 것이라고 본다. 지금의 정치는 다른 방식으로 더 정교하고 세밀하게 국민의 주권 행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앓고 있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 심각하다. 이 부분은 이번 글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더 나가지 않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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