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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선수를 '극복 서사'에 가둬놓는 언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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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정수현 기자] 언론이 생산해내는 장애인의 이미지는 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장애인 스포츠 선수를 다룰 때에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운다. 바로 ‘극복 서사’다. 패럴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의 이름 앞에는 늘 ‘장애 극복’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왔다. 무엇을 극복한다는 것인가?

 

장애 극복 서사에서 척도가 되는 것은 결국 ‘비장애인의 몸’이다.

 

언론은 장애를 가진 선수를 감동의 원천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들이 가진 장애에 집중하고, 대중은 그들이 ‘신체적 정상성’을 획득하려는 시도에 경의를 표한다.

 

 

"지난달 18일 막을 내린 2018 평창 겨울 패럴림픽은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저마다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장애인 선수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중략) 장애를 떨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다섯 남매의 자랑스러운 모습은 큰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이 개최됐을 당시 한겨레에서 노르딕스키 이도연 선수를 묘사한 기사 본문 중 한 대목이다. 전형적인 ‘극복 서사’로서 재현되는 장애인 선수의 이미지가 여과없이 드러났다. 역경을 이겨낸 장애인 선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는 표현을 보자. 왜 그들 개인의 스포츠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되는가?

 

장애인 선수들은 장애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혹은 장애라는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들은 이렇게 ‘감동’, ‘고난’, ‘역경’, ‘희망’, ‘용기’, ‘오뚝이’ 등과 같은 표현을 동원해 "감동적인 장애 극복"이라는 상징 목적으로 장애를 소비하면서 실재하는 스포츠 선수 한 사람의 삶을 지워버린다.

 

'장애인은 나쁘다'는 말만큼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발언이 '장애인은 착하다'라는 말이다. 그들에게 ‘순수하다’, ‘착하다’라는 프레임을 멋대로 씌우고 늘 순수하고 착할 것을 요구하는 것만큼 편견 가득한 시각이 있다. 바로 그들을 극복하는 혹은 극복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동안 장애인들은 미디어에서 역경 극복의 프레임으로 묘사돼왔지만 모든 장애인이 자신의 역경을 딛고 성공할 수는 없다. 모든 비장애인이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장애인이 성공한 모습을 반드시 보여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각자 위치에서 자기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 비장애인에게 감동, 희망, 용기 등 어떤 가치를 전시해주고 소비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32회 도쿄 비장애인 올림픽, 한국방송 KBS의 모든 중계방송을 여기서 마칩니다.“

 

2020 도쿄올림픽의 폐막식이 중계된 지난 8일 KBS 이재후 아나운서가 방송을 마무리하며 던진 멘트다. 올림픽이라는 축제가 끝났지만 또 다른 축제 패럴림픽이 아직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비장애인 올림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올림픽은 가장 오래된 대중문화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60년부터 비장애인 올림픽이 폐막하면 신체적 장애가 있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패럴림픽이 개최되고 있다. 1988년 서울, 2018년 평창에서 패럴림픽이 개최된 바도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 비해 패럴림픽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 한다. 언론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패럴림픽에 대해 올림픽이 폐막하고 따라오는 부수적인 축제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도쿄올림픽 폐막에 방점을 둔 보도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올림픽을 비장애인 올림픽으로 표현하며 패럴림픽을 간접적으로 예고한 이재후 아나운서의 모습은 귀감이 될만하다.

 

"감정 포르노는 장애인을 더 장애인으로 여기게 할 뿐입니다. 장애인을 특별 취급하지 마세요. 장애인 육상선수 또한 그저 육상선수입니다. 공정하게 업적 그 자체로 능력으로 인정받게 하세요."

-호주 코미디언 '스텔라영'-

 

 

물론 올림픽에 장애인 선수가 출전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도쿄 올림픽에서도 폴란드의 파르티카 선수(오른쪽 팔에 선천적 장애) 등 장애인 선수들이 일부 출전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재후 아나운서의 해당 표현에 대해 올림픽은 비장애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논점으로 토론이 오갔다.

 

우리가 정말 생각해봐야 할 것은 대다수 언론들이 장애인과 장애인 선수를 소비하는 방식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관성이 너무 크다.

 

언론은 장애인 보도의 프레임 자체를 고민해봐야 한다. 이제는 장애인들이 극복 서사에 동원되어 비장애인의 미화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 역경을 극복하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왜 그들이 비장애인에 비해 압도적인 역경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 차별적 사회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험난한 역경을 이겨냈으니 박수쳐줄게!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탈피해보자. 장애인들이 비범하게 성공해야만 대접을 받는 비장애인 위주의 사회구조에 눈길을 돌려보자. 

 

1960년대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미국에서 배우 모건 프리먼은 동료 배우 마이크 윌리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종차별을 없애는 작지만 효과적인 방법이 있소. 내가 당신을 특권에 사로잡힌 백인 배우가 아닌 마이크 윌리스로 부르는 것이고, 당신이 나를 역경을 헤쳐나간 흑인 배우가 아닌 모건 프리먼으로 부르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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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여전히 '좋은 저널리즘'이라는 이상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정수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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