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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디퍼의 감상문⑫]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시선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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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라이트디퍼] 내가 읽었던 좋은 글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 속에 저장해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AI에게 부러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방대한 자료를 모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낼 수 있다는 점이다. 우연히 인간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만든 소설을 만났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인데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세상을 떠나버린 심시선 여사와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는 시선과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시선은 책 속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직업이 작가인 그녀는 생전에 남긴 글과 가족들의 개개인이 가진 소중한 추억들을 통해 회자된다. 

 


시선은 친자녀 3명(딸 2명과 아들 1명) 그리고 두 번째 남편을 통해 연을 맺게 된 딸 1명이 있었다. 4명의 자녀는 그들의 아들과 딸까지 총 12명이 특별한 시선의 10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다. 가족들의 ‘모던걸’ 답게 살아생전 시선은 자신과 관련된 형식적인 것들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덤을 만들지 말 것, 제사를 지내지 말 것 등등. 그녀의 유지를 따라왔던 가족들이었지만 이번 딱 한 번만 이주노동자로서 고된 하루하루를 살아낸 젊은 그녀의 삶터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그러나 평범한 제사는 아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도 없고 훈계하는 어른들도 없고 지켜야 하는 규율도 없다. 그녀의 첫째 딸 명혜는 가족들에게 “이걸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었던 순간”을 하와이에서 수집해 오라고 지시하고 그 순간들을 시선에게 바치기로 한다.


사실 시선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여성이다. 하와이에서 우연한 기회로 독일 화가 마티아스마우어를 만나 그림 그리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지만 그는 시선에게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가한다. 첫 번째 남편 요제프리는 그런 시선을 마티아스의 학대로부터 구해주지만 둘은 악의적인 추문에 시달리며 독일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민자의 삶에 적응하지 못 한 요제프리가 말없이 가족들을 떠나버리고, 두 번째 남편 홍낙환과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 정착한 뒤로 그림을 포기하고 글을 쓰며 생계를 꾸려가던 시선에게 홍낙환과의 만남은 로맨스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타고난 광고쟁이로 불리던 홍낙환은 그녀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며 그녀의 커리어를 돕는다. 

 

작가로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유별난 그녀의 사생활은 늘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며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받아들이기는 했습니다마는..... 말하는 여자는 미움 받으니까. 뭐 기왕 미움 받고 있는 내가 해버리자,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아낄줄 아는 사람들은 노출되는 자리를 신중히 삼갈줄, 아니 누군가는 내 또래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 했지요. 남들이 걷는 길에서 벗어난 내가 자격이 있나 싶으면서도 길에서 벗어나야 길이 보일 때가 있으니 계속 했어요. 

 

시선은 사람들 앞에서 필요없는 말은 버리고 해야 할 말은 기어이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를 정신적 버팀목으로 여기며 살아온 가족들은 인생에서 기쁘고 힘든 순간 그녀를 추억한다. 

 

할머니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쉽게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정세랑 작가는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다. <시선으로부터>는 실제 가족들이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보자는 농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인생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주인공 심시선은 2023년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멘토상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시선으로부터>는 21세기에도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한 여성들 그리고 소수 집단에 속해서 상처 받게 되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다. 꼭 읽어보길 바라며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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