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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100’으로 ‘99’를 있는 힘껏 누르고 있다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6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심리 상담을 가서 상담사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천국에서... 저는 나체에요.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 밑에 그냥 누워 있어요. 한 손으로는 사과를 들고 있고 껍질 채 베어 먹을 거예요. 왼손으로는 골든리트리버 디디를 쓰다듬고 있고, 오른쪽 종아리에 레오가 기대서 저랑 같이 언덕을 바라보고 있네요. 레오털의 촉감이 맨 다리에 그대로 느껴져요. 바람이 조금 불고요. 근데 춥진 않아요.

 

당신이 처음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면 상담사가 몇몇 심리검사를 요청할 것이다. 그중 하나인 <CTI> 검사는 태어난 순간부터 절대 바뀌지 않는 당신의 ‘기질’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다. 이 검사는 크게 4가지의 지표로 내담자의 기질을 해석한다. 첫 번째 기질은 ‘자극 추구’. 똑같은 것보단 늘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며, 실행력이 높고, 어떻게 보면 공격적이기도 하다. 두 번째 기질은 이것과는 아예 다른데 모든 위험을 회피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두 지표가 모두 높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한다. 평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테니 첫 번째 기질이 앞으로 가고 싶다 하면 두 번째 기질이 뒤로 가라고 소리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도 이 기질 2개가 모두 높은 사람이다.

 

첫 번째 지표(자극 추구): 99

두 번째 지표(위험 회피): 100

 

99 vs 100

최강 대 최강의 싸움

 

늘 이런다고 해놓고 저러며, 헤어진다고 해놓고 다시 만나고, 이걸 계획해놓고 저걸 실행하는 양치기 소년 같은 사람으로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꽤 쓸모 있는 변명거리인 셈이다. 2023년 빈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만난 친구가 있는데 나의 첫 번째 기질이 원하는 모습에 가깝다.

 

미안. 그냥 내가 이렇대.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산 지 오래됐어. 실망했다면 미안. 근데 날 오해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니? To. 실망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치마 길이와 머리카락 길이로 학생을 체벌하고 점수를 깎던 그때 그 시절. 우등생이라는 특혜 뒤에 숨어 고등학교 시절 내내 치마가 짧았던 이유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도시가 베를린인 것도,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제일 좋아하는 축제인 것도, 핑크색 단발 머리, 깡마른 몸의 절반이 색색깔의 타투로 도배된, 팔 곳곳에 자해 흔적이 있는, 쉬는 시간 마다 줄담배를 펴대는, 베를린에서 카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나를 상상하며 즐거워 하는 것도. 어쩌면 100의 자아가 다 누르지 못한 99의 자아 때문일 것이다. 나도 2가지 자아가 이렇게 다른 게 놀라운데 타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100으로 99를 있는 힘껏 누르고 있다.

 

뽀얗게 화장을 하고, 검정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으며, 살짝 배를 드러낸 크롭티는 디라이트 앞치마로 가린다. 졸업한 대학명을 듣고 ‘인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니까 은비씨는... 어느 문명사회에서도 용납 받지 못하는 모습이 되고 싶은 거네요? 그런 자아로 살고 싶은데... 지금 제 앞에 있는 은비씨처럼 살려면 굉장히 엄청난 에너지로 그 자아를 누르고 있겠는데요? 99를 누르려면 100이 얼마나 강하게 힘을 줘야 할까요?

 

나는 상담사의 말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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