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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④] '공정성'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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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저는 토론식 수업을 자주 하기 때문에 강의에서 여러 사회 이슈를 다룹니다. 그러다 보면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되는데요. 정치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저는 평소 정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정된 재화를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

 

정치는 분배의 과정

 

이 정의는 국가 예산안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년 정부는 한정된 국가 예산을 어디에 쓸지 결정합니다. 국회는 행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심사하고 사업 타당성을 따져 세금이 적절하게 사용되는지, 낭비는 없는지 감독하죠. 2021년 국가 예산은 555조 8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8.5% 늘어난 액수입니다. 기획재정부의 자료를 보면 이번 예산안은 일자리 확충, 복지 증대, 디지털 역량 강화, 환경 문제 해결, 방역, 국방 문제 등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산안을 보면 정부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산의 분배는 정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산이 정치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누가 서울시장이 될 것인지,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될지를 결정하는 일도 정치입니다. 선거 기간이 아니라도 당대표 선출, 장관 임명 등은 언론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뉴스입니다. 국회나 정당 밖에서도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나타납니다. 학교의 장은 누가 될 것인지, 인사 이동에서 누가 승진할 것인지 등은 그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학내 정치’ ‘사내 정치’라는 용어가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 지위와 권력의 분배는 예산을 결정하는 것 만큼이나 정치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누가 지위와 권력을 갖느냐가 그 공동체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합니다.

 

정치에서 분배되는 재화 중에는 보다 추상적인 대상도 있습니다. 투표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자는 주장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고, 매년 개최되는 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탄핵 정국에서 국기를 전면에 내세운 태극기 부대가 등장한 이유는 태극기가 국가 수호와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욱일기를 활용한 디자인에 분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인들에게는 별 의미 없는 문양이겠지만 한국인에게 욱일기는 제국주의와 반성없는 일본의 현대사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권리, 사회적 인정, 사회문화적 상징 등은 정치를 통해 분배되는 추상적 가치들입니다. 누가 권리를 갖고, 어떤 정체성을 인정하고, 어떤 상징을 받아들일지는 중요한 쟁점입니다.

 

증가하는 공정성 인식

 

제가 설명한대로 정치를 ‘한정된 재화의 분배 과정’으로 본다면 분배의 방식과 기준을 결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장려하고 무엇을 금지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죠. 여기서부터 문제가 어려워집니다. 최근 화두가 된 공정성 이슈에는 앞에서 봤던 유무형의 가치가 적절하게 분배되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주요 공기업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논의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정규직 전환이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이 주장은 누가 정규직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지위의 분배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죠.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자녀 교육 문제에 시민들이 분노한 이유는 교육 기회가 정당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이고, 부동산 문제가 2030 세대의 역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의 부가 정의로운 방식으로 분배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공정하게 사회의 자원을 분배하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점점 커지지만 정작 ‘공정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기 어렵습니다. 각자 나름의 기준은 있지만 합의된 공정성 기준을 만드는 것은 이해당사자가 많아질수록 더욱 힘들어집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은 정규직 지위를 노력을 통해 획득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잘 봐서 얻은 자격이라고 생각하죠. 반대편에서는 정규직 지위를 자격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사회가 개인에게 제공해야 할 필수재라고 생각하죠.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을 제공하면 누구나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주장에도 유사한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양측 모두 ‘공정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단어에 포함된 의미는 다릅니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시가 공정한지, 수시(학생부종합전형)가 공정한지’는 매년 반복되는 쟁점입니다. 학종이 부모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보는 이들은 정시 확대를 주장합니다. 정시도 부모의 재력에 영향을 받고, 오히려 학종이 소외계층 학생들에게 기회를 열어준다고 생각하는 측에서는 학종이 더 공정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죠. 하나 같이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은 다릅니다.

 

 

부동산 정책을 두고 논쟁할 때도 시장 논리에 따른 분배라는 관점과 필수재로서 집을 바라보는 관점이 충돌합니다. 한쪽에서는 부동산 시장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다른 쪽에서는 집을 단순한 재산이 아닌 (예전 논과 밭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 활동에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진입 장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정성’과 ‘평등’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지만 상황이나 분배되는 재화의 성격에 대한 인식이 달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셈입니다.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뻔한 이야기지만 결국 공론장의 부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는 다원화됐고 공유된 소통 창구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세대마다 소통 방식이 다르고 같은 세대 내에서도 집단이 다르면 의견이 공유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미디어의 빠른 전환 속도는 오랜 시간 고민해야 할 공적 문제마저 스낵 콘텐츠로 만듭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할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문제가 터지면 그때마다 대중적 분노와 열광이 정책을 결정합니다. 분노나 열광 같은 정서는 정의롭지 않은 상황을 변화시킬 귀중한 동력이지만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공하진 않습니다. 상황을 한탄하는 데서 끝내지 않으려면 어떤 분배 방식이 공정한지,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의 정치가 풀어야 할 주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프로필 사진
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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