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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⑨] '이준석과 박성민' 무엇이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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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지난 6월11일 이준석 대표가 보수정당 국민의힘의 당권을 잡았습니다. 국회의원 평균 연령이 50대 중반 이상인 상황에서 만 36세의 나이로 100석 이상의 큰 정당의 당대표가 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뜻이겠죠. 청년세대의 목소리가 정치권에 반영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흐름에 발맞춰 청와대는 만 25세의 박성민 청년비서관을 발탁했습니다. 파격적인 인사죠. 두 사람은 정치에 새로운 시각과 논리를 가져올 인물로 큰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의 청년 정치인이 두각을 나타내는 과정에서 공정성 시비가 붙었습니다. 이준석 대표의 경우 평소 신념으로 갖고 있던 ‘능력주의’(Meritocracy)가 공정하지 않은 기준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박성민 비서관은 만 25세의 나이에 1급 공무원이 됐다는 점이 다른 공무원에 비해 불공정한 처사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제가 네 번째 칼럼(‘공정성’에 대한 고민)에서 정치를 ‘한정된 재화를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는데요. 물리적 재화 뿐 아니라 유무형의 가치도 분배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정성 논쟁은 유무형의 재화를 분배하는 기준이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정성’의 기준

 

어떤 재화를 분배할 때는 크게 평등, 필요, 자격 등 3가지 기준이 적용됩니다. 헌법 제2장에 나오는 자유와 권리(법 앞에서의 평등, 표현의 자유, 교육받을 권리 등)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재난지원금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필요에 따른 분배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공무원이 될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분배의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개의 공정성 시비는 어떤 재화를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이냐를 두고 발생합니다.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능력주의’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이 1958년 출판한 책 『능력주의』(원제 『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서 제시된 용어로, 개인의 실력과 업적을 재화의 분배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죠.

 

박성민 비서관이 발탁된 배경을 비판하는 이유도 이 능력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행정고시를 통과해 5급 공무원이 돼도 1급 공무원이 되려면 30년 가까이 일해야 하는데, 20대에 실력이나 업적을 증명하지 않고도 1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불공정해 보입니다. 일반직 공무원과 임명직(정무직) 공무원을 구분하지 않고 나온 부당한 비판이지만 이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이 능력주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가치있는 재화를 얻으려면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겠죠.

 

 

한국 사회에서 그 자격은 시험을 통해 부여됩니다.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은 1급 비서관, 입사 경쟁 없이 공기업 정규직이 되려는 청소노동자, 수능이 중요하지 않은 수시전형(학생부종합전형, 기회균등전형)은 지위의 불공정한 분배처럼 보입니다. 시험을 통해 자격을 증명하지 못 했으니까요. 상황에 따라서는 평등하게 혹은 필요에 따라 재화가 분배되어야 하지만 자격에 따른 능력주의적 분배방식이 유일한 공정성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들만 사용했던 용어인 ‘능력주의’가 대중적 용어가 된 데에는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역할이 큽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은 샌델은 정의(분배)의 기준이 능력주의가 가정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존 롤스의 정의관

 

샌델도 유명하지만 현대 정치철학에서 정의 문제를 다룬 가장 유명한 철학자는 『정의론』을 쓴 ‘존 롤스’(John Rawls)입니다. 샌델을 비롯해 정의 문제를 다룬 여러 학자들의 주장은 롤스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롤스의 이론을 이해하면 훨씬 더 생산적으로 공정성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습니다.

 

롤스가 『정의론』에서 일차적으로 다룬 주제는 ‘사회의 기본 구조’(basic structure of society)입니다. 기본 구조가 개인의 권리나 의무를 규정하고 기대와 소망의 형태를 결정하기 때문이죠. 미얀마 같은 군부 독재국가에서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되고, 구성원의 참여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갖기 어렵습니다. 빈부 격차가 심한 몇몇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빈곤층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하지 못 해 속수무책인 상황이죠. 어떤 사회의 기본 구조는 개인이 선택하고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결정합니다.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의 기본 구조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롤스의 이론은 일종의 ‘사회계약론’입니다. ‘사회계약’하면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떠오를 텐데요. 자연상태에서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가 만들어진다는 이론은 홉스와 로크, 루소를 거치면서 국가의 권한과 의무, 한계를 설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롤스는 근대의 사회계약론과 다르게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기보다는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사회의 기본 원칙을 결정하는 가상적 상황으로 사회계약을 활용합니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가상적 상황을 설정하는데요. 이는 사회계약론의 자연상태에 해당합니다. 원초적 입장 속에 있는 당사자들이 사회의 기본 원칙을 정하는 겁니다. 여기서는 현실과 다르게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라는 제약이 있습니다.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자신의 지위와 계층, 능력, 가치관 등을 모르는 상황입니다. 롤스는 자신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살아갈지 모르는 원초적 입장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하지 않은 원칙이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도출된 원칙이 ‘정의의 두 원칙’입니다.

 

  첫째,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즉 (a)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b)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첫 번째 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두 번째 원칙은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두 개의 세부 원칙으로 나뉘는데 (a)는 사회적 약자에게 최대한의 이득이 될 때 불평등을 인정할 수 있다는 내용(차등의 원칙)이고, (b)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될 때 불평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공정한 기회 평등의 원칙)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명목적으로만 그럴 뿐 우리는 결코 개개인이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을 압고 있습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표현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가족, 재산, 지역, 재능 등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임의적 조건과 운에 따라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하는데요. 롤스는 이런 임의성과 운의 영향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라지지 않을 불평등

 

사회에는 경제자본, 문화자본, 관계(사회적)자본 등 여러 영역에서 격차가 있습니다. 제가 인문학 강의를 하는 강사니까 교육 문제에만 한정해서 생각해보면 경제자본은 어떤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통계청이 올초 발표한 자료를 보면(「2020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 월평균 소득 800만 원 이상 가구 학생과 200만원 이하 가구 학생을 비교했을 때 사교육 참여율은 2배(80.1%/39.9%), 사교육비는 5배(50만4000원/9만9000원) 차이가 납니다. 의무 교육을 받고 동일한 시험을 치른다고 해서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죠.

 

문화자본은 어떤 꿈을 꿀 수 있는지에 영향을 줍니다. 고등학교 수업을 다녀보면 대도시 학생과 시골 학교 학생들 사이에 태도 차이가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래희망을 보면 두 집단이 극명하게 대비되는데요. 대도시의 학생들은 여러 형태의 전문직을 선호하는 반면 시골학교 특히 섬마을 학교에 가면 선생님을 꿈꾸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지역은 문화자본을 좌우하는 한 요소로 정보 접근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문화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미래의 꿈에도 영향을 줍니다.

 

관계자본은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것에 다가갈 수 있느냐를 결정합니다. 정치인 자녀의 대입 및 취업 등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로서 뉴스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로 좋은 스펙과 직장을 갖게 되지는 않았는지 나아가 그것에 불법적인 요소가 있지는 않은지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고 때로는 분노하곤 합니다. 관계자본 즉 인맥이 풍부할수록 비공식적 경로를 이용할 힘이 더 많아지는 것이고 그만큼 기회의 폭도 넓어집니다. 이런 불평등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롤스의 이론에서 주목할 점은 개인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사회적 기본재'를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자유, 기회, 재산, 권리, 자존감 등은 한 개인이 인생 계획을 합리적으로 구상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이 이런 기본재의 보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데요. 현실적으로 불평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의론』은 사회적 약자에게도 최소한의 기본재를 보장한 뒤에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불평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롤스는 사회의 기본구조를 다룹니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죠. 후기 이론(『정치적 자유주의』)으로 가면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여전히 롤스는 사회의 기본구조와 원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정의관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대중매체에서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정치인들이 정의와 공정성을 무기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용어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많은 경우 정치인들은 ‘정의’의 피상적인 이미지만 이용할 뿐 기준과 원칙없이 정치적 이득을 위해 특정 계층의 분노만 자극합니다. 이런 식의 말초적인 논의는 정쟁을 위한 것일 뿐 사회 정의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의와 공정성이 하나의 시대정신이 된 상황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롤스가 한 것처럼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대개 그렇듯이 ‘정의’도 쉽게 정의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을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히 토론을 한 이후에야 우리는 구체적으로 사회 정의에 대해 논의할 수 있습니다. 책임감 있는 정치인이라면 피해선 안 될 과제죠. 제가 분배의 문제와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 길고 어려운 설명을 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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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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