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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⑧] '다양성'을 참지 못 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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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인기있는 문화 콘텐츠는 그 시대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1978년 출판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우리는 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간접 경험할 수 있고, 1987년 발표된 소방차의 노래 <어젯밤 이야기>는 당시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댄스 노래로 대중음악의 변화 양상을 보여줍니다. 1999년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쉬리>는 국내 첫 200만 관객 돌파 영화인데 그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당시 한국 영화의 성장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수많은 부모님들의 속을 끓게 했던 <스타크래프트> <바람의나라> 등과 같은 게임은 지금 돌아보면 디지털 문화의 성장을 상징하는 콘텐츠입니다(사실 두 게임이 90년대에 출시되었다는 건 비밀입니다). 2013년에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는 급증하는 1인 가구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프로그램이죠. 어떤 콘텐츠든 어느 정도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회를 비추는 거울 넷플릭스 시트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제가 최근 며칠 동안 빠져있는 콘텐츠가 있는데요. 넷플릭스에서 6월18일 공개한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이하 지구망)>입니다. 지구망은 대학의 국제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청춘 시트콤입니다. 그래서 외국인 출연자가 많은데요. 어눌한 발음에 어설픈 연기지만 외국인 유학생 역을 맡은 배우들이 매력적이고 시트콤 특유의 과장된 유머도 오랜만이라 반가웠습니다. 얼마 안 본 것 같은데 주말 동안 정주행을 마쳤습니다.

 

지구망에도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겁니다. 우선 넷플릭스라는 접근 경로가 이전과는 다르죠. 전에는 시트콤을 TV로만 봤었는데 이젠 방송사가 아니라 OTT(Over The Top /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서비스) 기업이 시트콤을 제작합니다. 레거시(전통) 미디어의 쇠퇴를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다음으로 이 시트콤의 독특한 특징은 주요 출연자의 절반이 외국인이라는 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미녀들의 수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등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드라마, 시트콤을 통틀어 이렇게 외국인이 많이 출연한 콘텐츠는 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다양성이 한층 더 진화했습니다.

 

동시에 <지구망>에 대한 반응을 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 그런 다원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고편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외국인의 발음, 캐릭터 설정, 영상 퀄리티 등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팬으로서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악플에 대응하는 옹호글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악플을 게시한 표면적 이유는 연기와 작품 퀄리티 때문이지만 이런 반응의 이면에는 생소한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외국인 유학생(민니/요아킴/카슨), 피부색이 다른 토종 한국인(한현민), 성소수자(테리스 브라운)는 TV였다면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공중파였다면 외부의 압력을 많이 받았겠죠. 글로벌 콘텐츠 제작 기업으로서 넷플릭스는 그동안 사전 제작 시스템을 활용해 실험적이고 다양성을 지향하는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했습니다. <지구망>도 "참 넷플릭스답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트콤입니다.

 

다양성을 참지 못하는 인간

 

다원주의 사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나와 다른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은 개인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고 소속되려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외부집단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죠. 제가 몇 번이나 언급한 ‘내집단 편향(ingroup bias)’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기나긴 인류 역사상 동질집단에서 벗어나 서로 섞여 살게 된 경험은 극히 예외적입니다. 우리 사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 유학생을 보게 된 것은 채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집단으로 여겼던 타인을 받아들이기엔 짧은 시간이죠. 여전히 그들은 우리 사회의 이방인입니다.

 

일본의 신경과학자 나카노 노부코는 <정의 중독>에서 나와 다른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생물학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타인에게 ‘정의의 철퇴’를 가하면 뇌의 쾌락중추가 자극을 받아 쾌락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 쾌락에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며, 항상 벌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타인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상태를 정의에 취해 버린 중독 상태, 이른바 ‘정의 중독’이라 부른다. 인지 구조가 의존증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중략)

 

정의 중독 상태에 빠지면 나와 다른 것을 모두 악으로 간주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이면 ‘몰상식한 인간’이라 규정짓고 어떻게 공격할지, 상대에게 최대한 큰 타격을 주기 위해 어떤 말을 할지 고심하게 된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악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은 쾌락을 느낍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각종 사건사고 뉴스를 보며 욕을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악플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악플러들은 대립각을 세우고 자신을 정의와 선의 편으로 상정하며 존재감과 우월감을 느낍니다. 노부코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에게 모두 이런 성향이 내재해 있다고 말합니다.

 

피부색이나 국적은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에 너무도 쉬운, 눈에 띄는 표적입니다. 잊을만하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혐오 표현이 들리고 “특정 국가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편가르기를 하고 타인을 악으로 매도하는 기준에 피부색과 국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젠더, 성적취향, 계층, 세대, 직업 등의 구분은 정의 중독자의 손쉬운 먹잇감입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 같은 사회의 공공선을 명목으로 삼지만 그 내용은 원한과 증오로 채워지고 서로를 헐뜯는 데서 얻는 쾌락만 남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존재와 다른 생각은 미개하고 열등해서 사라져야 할 것들입니다.

 

미래 시점에서 본다면

 

<ODG>라는 구독자 260만의 유튜브 채널이 있습니다. 그 채널 콘텐츠 중에는 어린 학생들이 유명 연예인들을 만나는 영상이 있는데요. 출연한 연예인들의 전성기는 학생들이 태어나기 전이거나 아주 어렸을 때라 아이들이 연예인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상 댓글을 보면 “이제 이 가수를 모르는 세대가 왔구나“라는 탄식이 대부분인데 가끔 “학생들이 답답하다”거나 “왜 이 사람을 모르냐”며 비난하는 댓글들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댓글들이 많이 순화된 상태인데요. 저는 처음 그런 댓글을 봤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작 연예인인데 이런 반응이 나온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와 다른 경험, 나와 다른 생각과 태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편해하는 모습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입니다.

 

사회는 점점 다원화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시대는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다양한 문화와 생각의 공존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노부코의 이야기처럼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자주 누군가를 평가하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는, 서로에게 관대한 사회는 불가능한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계급과 경제력, 피부색과 성별에 따른 차별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차별은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하나하나 사라졌죠. 과거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도 그런 상황 속에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더 이상 차별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이 시대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상대에 대한 두려움, 낯선 것을 마주할 때 느끼는 긴장,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불편함은 견디기 힘들지만 미래 시점으로 가면 그런 모습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만큼이나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저주하거나 모욕하지 않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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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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