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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①] “폭력을 어떻게 다루느냐” 국가와 정치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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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문명훈 칼럼니스트] 19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년~1920년)는 국가라는 조직 자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국가란 뭘까요? 정치는 또 뭘까요? 베버는 본인의 강의록을 책으로 엮어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적 정당성, 정치인의 유형, 정치인의 자질, 관료제와 민주주의 등에 대해 논했습니다.

 

 

베버는 근대 국가의 가장 큰 특징에 대해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라고 정의합니다. 국가의 본질을 폭력의 독점으로 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사적 폭력을 금지하고 법률에 입각한 강제적 폭력을 행사합니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국가, 여러 군벌이 지배하는 사회, 무장집단의 테러가 빈번한 곳은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세 유럽은 제대로 된 근대 국가의 특성을 갖고 있지 못 했습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지 못 했고 여러 세력 집단들이 폭력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지 못 하면 공동체 내부에서 무질서가 판을 칩니다. 국민들은 무능한 국가를 신뢰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폭력 집단이 자기들 마음대로 협박하고 상납금을 받는다면 국민들은 자신을 보호하지 못 하는 국가보다 폭력 집단의 지배를 인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폭력을 독점하지 못 하는 국가는 사회 질서를 유지할 힘이 없습니다. 다시 국가성을 일으켜 세우려고 해도 한 번 잃은 신뢰는 회복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마약 카르텔의 힘이 강한 멕시코와 같은 국가가 대표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가 국가일 수 있는 이유는 폭력의 독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국가의 폭력은 사적 폭력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범죄자를 구속한다거나, 코로나 상황에서 경찰력을 동원해 집회를 막는다거나, 확진자의 이동을 금지시킨다거나 하는 등의 조치는 국가의 강제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것, 교통 법규를 위반한 사람에게 벌금형을 선고하는 것, 병역의 의무를 강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강제적 조치이지만 국가의 폭력은 정해진 법률에 입각한 제도화된 폭력입니다. 국가는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선을 위해 정해진 방식에 따라 폭력이 사용됩니다.

 

미국 방송사 HBO가 방영한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는 결투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드라마의 주요 인물인 티리온 라니스터는 두 번이나 결투 재판을 신청합니다. 라니스터는 직접 결투를 할 수 없어 대리인을 내세웁니다. 실제로 중세에는 결투를 통해 잘잘못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법률에 의거해 재판하지 않고 사적으로 복수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몬태규 가문과 캐퓰렛 가문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고 결투와 패싸움을 벌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지금 당장 억울하더라도 개인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적 폭력은 처벌의 대상입니다. 사적 폭력을 억제하고 공적 폭력을 통해 원칙에 따라 지배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폭력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정치인은 공적 폭력을 다룹니다. 대통령의 결정, 국회의원의 의결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설정하고 단계별로 여러 방역조치를 정해서 강제합니다.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5인 이상 집합금지 명령을 내리고, 카페와 술집의 운영 시간을 제한합니다. 국가는 강제력을 동원해서 코로나의 확산을 막으려고 합니다. 국가가 방역 정책을 강제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 이런 강제력 행사는 부정적인 영향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방역조치를 강제하면서 자영업자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공적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은 늘 피해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2009년 1월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 참사’는 국가의 공적 폭력이 내포하고 있는 양면성을 드러냈습니다. 서울시는 용산 4구역을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했지만 세입자들은 보상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3개월치의 휴업 보상비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거에 반대하며 건물을 점거한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는 극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당시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이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참사가 빚어졌습니다. 과잉 진압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철거민의 사적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불가피한 공권력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용산 참사와 유사한 비극은 과거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공적 폭력을 사용하는 정치인은 어떤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요? 베버는 정치인에 대해 “(합법적) 폭력이라는 악마적 수단을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천사적 대의의 실현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폭력은 아무리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더라도 해악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인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폭력의 결과를 감내해야 합니다. 선한 목적과 악마적 수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겁니다. 베버는 정치인에게 ①대의에 대한 열정 ②책임감 ③균형감각 등 3가지 자질을 요구했습니다. 먼저 대의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폭력 수단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이라도 폭력이 불러올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인은 폭력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공공선과 파괴적 결과 사이의 비중을 따질 수 있는 균형감각을 갖춰야 합니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했습니다. 베버는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책임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신념 윤리를 가진 사람은 순수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나쁜 결과가 나왔다면 행위자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투사들이 흔히 갖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니 결과가 나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유치한 생각입니다. 신념은 행위의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정치인은 폭력의 결과에 직면해야 하고 선의를 이유로 면책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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