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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⑮]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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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지난 글(칼럼 읽기)에서 《어쩌다 발견한 하루》라는 드라마를 언급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만화 속인데요. 작가가 만든 스토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는 캐릭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화 속 캐릭터가 작가의 의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듯이 우리도 이미 짜여진 극본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과 역할에 따라 나름의 규범이 주어지고 그 규범에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과 제약이 발생하죠. 조금만 방심하면 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환경에 휩쓸려 가게 됩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가끔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이야기에 삶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야기가 갖는 여러 기능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도 내가 어떤 생각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표현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조별 과제를 할 때도 내가 가진 생각과 지식을 정리해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그런 상황이 더 많아집니다. 특정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회의를 하고, 사업을 진행하고, 결과를 내야 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줄 이야기가 없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야기의 기능1: 갈등 해소

 

이야기가 가진 힘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이야기에는 문제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2021년 대한민국의 국가 예산이 558조원입니다. 내년에는 600조원이 넘는 슈퍼 예산이 될 거라는 뉴스가 많죠. 매년 정부는 예산안을 만듭니다. 국회는 연말이 되면 그 계획을 검토하구요.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막대한 규모의 국가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에서는 중요한 일입니다. 돈 뿐만 아니라 지위, 명예 같은 가치 있는 것들은 항상 분배가 문제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 누가 당대표가 될지,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아야 하는지 등등의 문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뉴스에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희소성 있는 한정된 (유무형의) 재화를 어떻게 분배할지는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인데요. 희소한 자원을 둘러싸고 항상 이해관계자들이 상호 갈등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청와대나 국회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죠.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어렸을 때 옷을 두고 다퉈본 적이 있을 겁니다. 서로 먹고 싶은 음식이 달라 친구들과 저녁 메뉴를 결정하지 못 할 때도 있구요. 회사에서는 승진을 두고 신경전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쁜 옷', '메뉴 결정권', '높은 지위'라는 한정된 재화를 두고 이해관계가 상충합니다. 사회에서는 지위, 시간, 돈, 인정, 관계 등 여러 가치를 두고 충돌이 생깁니다.

 

이런 충돌을 해결하는 원초적인 방법은 폭력입니다. 힘이 있는 경우에는 위력을 활용해 이득을 취하는 게 가장 쉽죠. 예전의 학교와 군대가 폭력이 통용되는 대표적인 예시일 겁니다. 지금은 체벌이 사라졌지만 제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수업 시간에 많이 맞았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 하거나 영어 해석을 하지 못 하면 책상에 올라가 허벅지나 발바닥을 맞았죠. 넷플릭스 드라마 《D.P.》는 군대 내 구타와 가혹행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요.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다지만 예전에는 그런 가혹행위가 일상적이었습니다. 폭력은 교실과 내무반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교사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들었죠. 그런데 이 방법이 나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약자의 권리와 자율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강제는 개인의 권리 뿐 아니라 조직을 경직되게 만들어 창조적 역량을 파괴합니다.

 

 

폭력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인간사에 이해관계의 충돌은 항상 있을 것이고, 문제와 갈등도 끊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사실 우리는 대안을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업 시간에 대화와 타협, 토론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죠. 하지만 대화와 타협은 일종의 이상으로 제시될 뿐 막상 어떻게 타협하고 토론해야 할지 배워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학교에서 논리적 표현에 대해 배우기는 하지만 실제로 적용하는 데까지는 난관이 많습니다. 논리와 감성을 적절히 활용해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입니다. 이야기에는 타인을 설득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수업시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주문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야기의 기능2: 가치 창출

 

갈등 해결 외에도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많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사회적 가치를 만들기도 합니다. 광고를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요. 2020년 한국광고대상 수상작 중에 〈문명의 충돌〉이라는 아파트(KCC스위첸) 광고가 있습니다. 이 광고에는 신혼부부가 나오는데요. 30년간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부부가 한 집에 살게 되면서 화장실 쓰는 습관, 취미, 성격 등등 서로 맞지 않은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광고는 대부분 시간을 할애해 그런 충돌을 그리고 있죠. 그러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그래도 맛있는 거 먹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니까”와 같은 감동적인 독백을 들려줍니다. 

 

 

이 영상의 유튜브 조회수는 3500만회(2021년 10월 기준)인데요. 광고 영상을 유튜브로 이렇게 많이 찾아보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신경 쓰지 않으면 이 영상이 아파트 광고라는 것도 알기 어려운데요. 이 광고는 아파트 브랜드 대신 두 부부의 서사를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시킵니다. 2600여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우리 집 이야기인 것 같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이 반응이 바로 광고가 노리는 목표입니다. 사람들이 상황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고 감정이입을 이끌어내서 감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긍정적 정서를 브랜드에 투영하도록 유도하는 거죠. 광고와 마케팅을 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정서와 인식을 바꾸고 소비 행위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만든 이야기는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내기도 합니다.

 

마케팅 분야에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치에서도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 복지제도가 계속 확대되고 있는데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10년 전에도 서울시장이었습니다. 33~34대 서울시장이었던 그는 2011년 보편적 무상급식 문제를 주민투표에 붙였다가 투표율 저조로 개표조차 하지 못 하게 되자 사임했습니다. 보수정당의 기본 입장은 선별적 복지인데요.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고 있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선별적 복지는 재원의 효율적 분배라는 논리를, 보편적 복지는 기초적 사회안전망 확충이라는 논리를 각각 갖고 있습니다. 두 입장의 대립은 최근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자를 결정할 때도 등장했죠. 어떤 논리가 여론의 지지를 많이 얻느냐에 따라 국가 정책과 제도가 바뀝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복지 정책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고 그 결과 한 사람의 정치 인생과 복지 시스템이 바뀌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경제영역에서도 정치영역에서도 어떤 이야기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현실을 바꿀 힘이 이야기에 있는 것이죠. 제가 수업에서 이야기를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야기의 기능3: 자아 형성

 

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신체적 조건, 직업, 성격, 취향,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 자아 정체성을 만들 겁니다. 그런데 자아 정체성에는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가령 제가 스스로를 '매우 잘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안타깝게도 저를 보는 사람들이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제가 '잘 생긴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닐 겁니다. 또 제가 스스로를 '뛰어난 강사'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제 강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 한다면 '뛰어난 강사'라는 정체성도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 정체성에서는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자기 인식)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타인의 인정)도 중요합니다. 정체성은 자기 인식과 타인의 인정이 균형을 이뤘을 때 안정적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 인식에 도움이 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 합니다. 수업을 하다보면 학생들은 평소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머릿 속에서 정보와 이미지, 감정이 떠다니지만 정확히 표현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그냥 흘러가게 됩니다. 저는 특히 감정과 관련된 수업을 할 때 자기 인식이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왜 불안한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 등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런 막연한 것들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타인의 인정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을 겪었는데요. 젠더 갈등이 그렇고, 성소수자를 둘러싼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아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 하고 좌절하고 있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이들이 취하는 전략은 비슷한데요.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를 알리는 거죠. 매년 열리는 퀴어 축제는 자신을 알리는 이야기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자아를 형성하고 인정받으려면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야기를 강조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가 갖고 있는 여러 힘에 대해 설명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은 고단한 일이죠.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은단오라는 캐릭터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때 인간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역할 속에서만 살게 됩니다. 그런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무의미함이 현대인을 허무와 무기력에 빠뜨리는 원인일 겁니다. 괜시리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프로필 사진
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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