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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⑩]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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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잘 모르는 사람과 술자리를 갖게 되면 눈치 게임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나이, 직업, 성별 등을 고려하면서 대화를 이어가죠. 그러다보면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술자리 뿐 아니라 전학을 간다거나 다른 팀으로 발령을 간다거나 하는 상황이 되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배우게 됩니다. 

 

 

일상 속 상호작용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 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데요. 상황마다 요구되는 행동방식이 다릅니다. 인문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 제가 강의에 들어가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있을 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강의실에서는 평소 잘 언급하지 않는 지식들을 수업 형식에 맞춰 풀어내죠. 마찬가지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있을 때에는 학생들에게 강의하듯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상황마다 행동방식은 다 다릅니다. 모든 상황은 그 나름의 논리가 있고 그 논리는 개인에게 일종의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이런 일상의 상호작용을 주목한 학자입니다.

 

행동의 기준이 되는 ‘상황 정의’

 

고프먼은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연극에 비유합니다. 개인은 각각 상황에 맞는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특정한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이죠. 저는 학생들에게는 강사로서, 부모님에게는 아들로서, 동창들 앞에서는 친구로서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친구들 앞에서 학생들에게 하는 것처럼 강의를 한다면 앞으로 친구들은 저를 만나지 않을 겁니다. 상호작용을 하는 개인들은 모두 그 상황에 맞는 상황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적절한 상황 이해를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으로 이어지게 되죠.

 

 

강의를 예로 들어볼까요? 수업에서 저는 강사로서 좋은 강의를 할 책임이 있고, 학생들은 제 수업에 집중하고 참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학생들도 비슷한 상황 이해를 갖고 있죠. 그래서 제가 예습을 해오라고 과제를 부여했음에도 그걸 이행하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고, 발표를 시켰을 때 말을 하고 싶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대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프먼은, 특정 조건에서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고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에 관하여 ‘상황 정의(definition of the situation)라고 명명했습니다. 상황 정의는 적절한 행동방식을 결정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상황 정의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타인의 상황 정의를 바꾸려는 시도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매력적인 상대가 있는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합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화장을 고치고, 향수를 뿌리고, 목소리를 바꾸고, 자신의 이야기를 돋보이게 각색하죠.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을 통제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욕구를 갖게됩니다. 상대의 상황 정의에 영향을 줌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싶은 겁니다. 자주 패러디되는 유명한 영화 대사에도 그런 심리가 깃들어있습니다.

 

“니 내 누군지 아나? 으이?! 내가 이 새꺄 느그 서장이란 임마!!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란 인마! 어제께도! 같이 밥 묵고 으! 싸우나도 같이 가고 으! 마 개이 새꺄 마 다했어! 이 섀끼들이 말이야... 개섀끼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경찰에게 체포된 최익현(배우 최민식)이 하는 말인데요. 이 대사는 단순히 화를 내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에 맞게 제대로 대접하라는 요청인 셈입니다. 상대의 상황 정의를 바꿔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상 관리'를 한다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인상을 관리해야 합니다. 인상 관리의 목적은 상황 정의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때로는 자신을 과대 포장하기도,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호감가는 사람을 만나면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자신감 넘치고 성격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능력있는 직원이라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뛰어난 업무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애를 쓰고, 성실한 태도를 보이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잘 보이고 싶은 일종의 동기부여로 작용하는 것이죠. 가끔은 자신의 기여도를 과장하고 경쟁자로 여겨지는 동료를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프먼의 비유를 적용해보면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나름의 배역을 맡아 가면을 쓰고 맥락에 어울리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 성향과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도 있고,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상황이 주는 압력에 내몰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죠. 그래서 인상 관리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개인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고프먼의 이론을 떠올립니다. 스타의 가면을 쓰고 빛나는 역할을 연출하지만 연출된 자아의 인상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처절하고 괴로운 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회는 항상 개인에게 특정한 역할을 맡아 그에 맞는 가면을 쓰라고 요구합니다. 지금 제 글을 읽는 독자들도 각각 자신의 인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겠죠. 그 역할과 가면 때문에 질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로필 사진
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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