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당초 정개특위(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17일 의원 정수 증원이 포함된 3개 안을 국회 전원위원회에 올리기로 했다. 한국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 양당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증원론에 동의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 모델도 없이 그냥 논의하면 안 되니까 그저 김진표 국회의장이 주도하는 자문위원회가 낸 안을 그대로 받아서 전원위로 올린 것 뿐이었다. 어찌됐든 2020년 총선에서 위성정당 사태로 귀결됐던 준연동형 캡비례대표제로 2024년 총선을 치를 수는 없기 때문에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소속 의원 다수의 의견을 모아 당론으로 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너무 중대한 사안이니 일단 자문위의 안을 전원위로 올려서 담판을 짓겠다는 것이 국민의힘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국민의힘 조해진 의원(정개특위 정치관계법개선소위 위원장)도 정개특위에서 증원론이 담긴 3개 안을 전원위로 상정하는 결의에 동의해줬다.
그런데 난데없이 국민의힘은 “의원정수를 절대 늘릴 수 없다”면서 마치 국민들의 정치 혐오 여론에 호응하는 것처럼 코스프레를 시전했다. 꼴배기 싫은 국회의원의 수를 더 늘린다고? 이런 국민들의 일반 정서에 기댄 국민의힘은 증원론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면서 사실상 승자독식의 기존 선거제도를 고수해서 의석수를 다 먹고 싶어하는 속내를 갖고 있다. 그나마 선거제도 개혁의 의의를 이해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마찬가지로 국민의힘의 반발을 명분삼아 현행 유지로 귀결되길 바라고 있다. 정치 개혁의 대의 보단, 거대 양당으로서의 정치적 이익이 훨씬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한국 정치를 독점해왔던 적대적 양당체제의 수혜자로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정의당을 비롯 원외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에서는 선거제도 개혁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선거제도의 1타 강사”로 알려진 녹색당 김찬휘 공동대표는 23일 오전 국회에서 연달아 기자회견을 두 번 개최했다. 언론 보도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국회의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에 다급했다.
우선 이날 10시 국회 정문 앞에서 정치개혁공동행동(정공)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김 대표는 상시 조직 선거제도개혁연대(전 비례민주주의연대)의 대표를 겸하고 있고 동시에 임시 조직으로서 정공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정공이 배포한 기자회견문의 핵심은 증원론을 통해서든, 지역구 의석 축소를 통해서든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정공은 “비례대표 의석의 획기적 확대없이 선거제도 개혁은 불가능하다”며 “대량의 사표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단순다수제 지역구 선거와 달리 비례대표 선거는 정당 득표율 만큼 의석을 배분하므로 비례 비율이 확대될수록 사표가 줄고 정당 득표율과 의석간의 비례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의 비율을 2:1로 끌어올려야만 한다. 현행 의원 정수를 유지한 채 비례대표 의석을 대폭 확대하고자 한다면 지역구 의석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회는 지금까지 지역구 의석을 줄이기는커녕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되려 비례 의석을 줄여가며 불비례성을 악화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의원 정수 확대라는 과제에 도전하지 않고 회피하기만 한다면 국회는 다시금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할 것이 불보듯 뻔하다. 현역 지역구 의원들이 스스로 지역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거나 재출마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현재의 지역구를 그대로 두고 비례성을 강화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정공은 “지금 국회와 정개특위의 행태”에 대해 “국회의원 증원에 반대한다는 일방의 반발에 못 이겨 제대로 된 토론도 없이 현행 의석수 유지를 전제로 논의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국민의 반대를 핑계삼지만 정작 본심은 극심한 불비례성에서 나오는 양당 기득권과 희소성에서 나오는 특권을 유지하려는 대국민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국민의힘 지도부의 융단폭격으로 인해 정개특위는 기존의 결의를 철회하고 증원론을 빼버린 3개 안을 전원위에 올리기로 했다. 민주당의 묵인은 상수였다.
①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병립형 비례대표제(의원 정수 300석 유지)
②개방명부식 대선거구제와 전국·병립형 비례대표제(의원 정수 300석 유지)
③소선거구제와 권역별·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원 정수 300석 유지)
증원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국민의힘은 의석수가 적어질수록 소수에게 집중되는 권한과 불비례성에 기대고픈 나머지 스스로 국회 혐오를 부채질하는 것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또한 원내 제1당으로 지난 대선부터 정치개혁을 외쳐왔던 민주당은 적정 의원 정수에 대한 책임있는 주장도 제시하지 못 한채, 국민의힘의 발목잡기를 핑계로 전원위원회 시작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찌감치 김 대표는 정공에 들어온 700여개 시민단체들의 공통된 선거제도 모델을 선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다들 “범국민적인 논의 과정”을 위해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취지에서 정공은 “전원위원회가 가지는 의미는 시작이 아닌 과정에 있다”며 “국회의원 전원이 국민과 함께 선거제도 개혁의 원칙과 방향이 무엇인지 재확인하고 공감대를 넓혀가는 단계를 거쳐야만 개혁을 위한 생산적 논의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정공 기자회견을 마친 김 대표는 국회 소통관으로 이동했고 11시에 녹색당 차원에서 제안하는 선거법 개정안 발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김 대표는 “사표를 줄이고 위성정당을 방지하는 500석 개방형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는 민주당 이탄희 의원과 정의당 이은주 원내대표가 배석했다.
김 대표는 정개특위가 제시한 3개 안에 대해 일일이 비판했다. ①에 대해서는 “단순 중대선거구제는 소선거구제 합치기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성남 수정, 성남 중원, 분당갑, 분당을을 합쳐 4인 선거구를 만들면 김태년(민주당), 윤영찬(민주당), 김병욱(민주당), 안철수(국민의힘) 의원이 그대로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 승자독식 선거제도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②에 대해 김 대표는 “병립형은 위성정당 방지책이 아니라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고서도 위성정당의 효과가 발생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연동형이 있고 병립형이 있다. 병립형은 한 마디로 지역구 당선과 비례대표 당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253석의 지역구에서 싹쓸이를 한 양당이, 47석의 비례대표에서도 사실상 싹쓸이를 할 수 있도록 아무 제한없이 승자독식을 허용해준 제도다. 반대로 연동형은 정당 득표율로 총 확보 의석수를 픽스해놓고 여기서 지역구 당선자를 뺀 나머지 의석을 할당하는 것이다. 300석(지역구 253석+비례대표 47석) 기준 정당 득표율 30%를 얻은 A정당이 지역구에서 100석을 얻었다면 기존의 병립형일 경우 총 114석(100 + {47x30%})을 받게 되고, 연동형일 경우 총 100석만 받게 된다. 연동형의 원칙으로는 90석(300x30%)이 맞다. 그러나 지역구 당선자 수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기 때문에 100석이 된다.
‘지역구 선거’에서 정당 득표율 이상의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은 양당이 ‘정당 투표’에서도 의석을 먹으려고 했던 것이 위성정당 사태의 본질이다. 그래서 김 대표는 병립형에 대해 “또 다른 위성정당”이라고 표현했다.
김 대표는 ③을 하려면 “반드시 전국 단위 봉쇄조항을 없애야 한다”며 이것이 “국제적 표준”이라고 강조했다.
전국 3% 봉쇄조항을 갖고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하게 되면, 과거에는 전국 3%만 넘으면 의석을 배정받던 정당이 이제는 전국 3%를 넘은 다음 각각의 권역의 크기에 따라 권역에서도 5%, 10%, 20% 등을 넘어야 한다. 진입장벽이 2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당 독식이 강화되는 것이다.
녹색당이 성안한 선거법 개정안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서울녹색당 박제민 공동운영위원장이 발표했다. 골자는 아래와 같다.
ⒶOECD 국가 평균 의원 1명이 인구 10만명을 대표하는 스탠다드에 맞춰서 의원 정수 500명으로 증원
Ⓑ253개의 승자독식 지역구 선거를 과감히 없애고, 광역단체 숫자 만큼 17개의 ‘대선거구제’로 전면 전환
Ⓒ각 정당이 17개 대선거구별로 제출한 비례대표 명단의 후보들에게도 직접 투표하는 개방형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실시
Ⓓ총 500석 중 450석은 17개 대선거구에서 받은 권역별 득표율에 따라 1차 배분하고, 나머지 50석은 전국 득표율에 따른 보정 의석으로 2차 배분하고, 기존의 봉쇄조항 3%는 ‘1%’로 대폭 낮춰서 사실상 봉쇄조항 없애기
박 위원장은 “꼭 기억해달라. 국회의원 수를 늘려야 국회의원들의 힘이 빠진다. 500명으로 늘려도 큰일 안 난다. 오히려 더 좋다. 월급 절반으로 줄이고 각종 특권 없애면 비용 부담없이 국회를 더 좋게 더 깨끗하게 더 일 잘 하게 만들 수 있다”면서 소수가 막대한 권한과 예산을 주무르는 것의 비극을 환기했다.
이은주 원내대표도 “500석이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OECD 기준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1인당 인구수가 17만명인데 OECD 평균 10만명이 되려면 국회의원 수가 514명은 돼야 한다”면서 동조했다.
무엇보다 1등이 받은 표 외에 나머지 2·3·4등이 받은 표는 전부 쓰레기통에 쳐박히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가장 문제적이다.
박 위원장은 “1등만 당선되는 승자독식 한판승부 소선거구제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1등 당선을 위해 지역 민원 해결에만 천착하는 국회의원들 때문에 나라꼴이 이모양이다. 동네 대장들만 활개치는 253개의 소선거구제를 과감히 없애고 17개의 대선거구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녹색당의 선거법으로 총선이 치러진다면 투표는 어떻게 하는 걸까.
서울녹색당 김유리 공동운영위원장은 “투표소에 들어가면 정당별 투표 용지들 중 자신이 원하는 한 정당의 투표 용지를 짚는다. 그 다음 2개의 선택지가 생긴다”고 말했다.
하나는 정당이 추천하는 후보자 순위를 수용하면 투표 용지 그대로 투표함에 넣으면 된다. 아니다. 나는 후보자를 직접 뽑고 싶다면 후보자에 기표해서 투표함에 넣으면 된다. 이런 녹색당의 정당별 투표 용지는 유권자의 투표 간소화, 투표 용지의 단순화를 실현한 안이다.
이탄희 의원은 초선 의원으로서 3년간 국회를 직접 겪은 뒤 한 마디로 “정치 양극화로 인한 무한 정쟁”을 반복하는 곳이라고 규정했다. 기득권적인 민주당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선거제도 개혁에 앞장서고 있는 이 의원은 “정치 다양성이 확보돼야 반사이익 구조가 깨져서 증오 정치와 혐오 정치를 그만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선거제도 개혁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1등만 당선되는 선거제도로 인해 상대를 저주하고 족칠려고 하는 적대 정치의 부작용을 인식하고 있다. 쟁점 사안이 생기더라도 무쟁점 사안에 대해서는 상시적으로 논의되어 처리돼야 하지만 적대적인 한국형 양당체제에서는 기본적으로 쟁점 이슈가 떠오르면 국회 전체가 마비되기 일쑤다. 상대의 못난 점을 부각하는 것이 야당의 가장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 되고, 여당은 야당이 승냥이처럼 으르렁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편을 쉴드치기 위해 대통령실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마련이다. 이 의원은 이러한 국회의 실상을 목도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난 수 십년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그러나 정치는 이 변화를 반영하지 못 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해관계와 처지가 얼마나 다양한가.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와 처지들을 반영하지 못 하는 정치구조로 인해서 대한민국 정치는 실종 상태다. 저출생, 지방 소멸, 기후위기, 격차 위기 등등 대한민국 공동체의 문제들을 우리 정치는 전혀 해결하지 못 하고 있다.
한편, 정공은 지난 21일 논평을 내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실효성있는 제도가 되기 위해서는 위성정당 방지법이 함께 구비되어야 할 것인데 현재 국회 정개특위에서 생산적인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환기했다. 이를테면 정당별 지역구 출마 규모에 따라 비례대표 출마자를 무조건 내도록 강제하는 등 위성정당 방지의 방법은 다양한데 준연동형을 할 것이라면 반드시 이 대목이 들어가야 한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