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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다이 인생⑮] 대한민국 뒤흔든 내부고발자 노승일의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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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노승일씨와의 인터뷰 날짜 이틀 전 그의 음주운전 전력을 알게 됐습니다. 윤창호법 체제가 시작된 2019년 이후의 일이었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스러웠습니다. 평범한미디어는 음주운전 피해 유족들과 함께 관련 법 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해왔고 음주운전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일단 만나보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기로 했는데 승일씨는 음주운전 적발 직후 스스로 “국민 여러분 깊은 사죄드립니다”라며 직접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던 사실을 환기했고 거듭 사죄의 뜻을 밝혔습니다. 음주운전 대목은 인터뷰 기사 말미에 나옵니다. <편집자 주>

 

독고다이 인터뷰 기획 시리즈도 어느덧 1년이 됐고 지금까지 15명의 인생을 조명했다. 독자들에게 소개할 새해 첫 독고다이 인생의 주인공은 노승일씨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정농단 내부고발자 그 사람이 맞다. 승일씨는 2016년 하반기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촉발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당시 인생을 걸고 내부고발을 감행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최순실의 음성과 영상은 모두 그가 제공한 것이었다. 국정농단 그 이후의 삶이 궁금했다.

 

 

승일씨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광주광역시로 내려왔다고 했다. 광주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건설 현장 막노동, 음식 장사 등 그야말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내부고발자의 삶은 너무나도 처절했다. 

 

지난 12월22일 14시 광주 북구에 위치한 평범한미디어 사무실에서 승일씨를 만났다. 폭설이 내렸고 매우 추운 날씨였다.

 

먼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가볍게 물었다. 승일씨는 명함을 건넸는데 인테리어 업체를 하나 차렸다고 했다. 승일씨는 “주로 건축일을 하고 있다. 건설 현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올해 5월 개인사업자를 내고 인테리어, 실내 건축, 집수리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족발집 개업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되기 어려운 현실이 있기 때문에 투잡과 쓰리잡은 기본이었다. 힘들지는 않을까? 역시 ‘불안함’으로 인한 고충이 컸다.

 

건설 노동은 안정적이지 않다. 생계 유지를 안정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이 상당히 애로사항이었다. 건설 현장에 비가 오고 눈이 오면 일이 중단된다. 고정 지출은 있는데 수입이 일정치 않으니까 힘들었다. 이 고충은 다른 건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다 겪는다.

 

힘들어도 극복해낼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 승일씨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족’이라고 말했다.

 

역시 가족이다. 가족 말고는 없다. 건설 현장은 정말 위험하다. 사고가 나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에 일하면서도 가족이 많이 생각난다.

 

승일씨는 딱히 전성기가 없다고 말했는데 다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바꿔 물었을 때는 ‘대학 시절’이라고 답했다.

 

전성기 같은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행복했던 시절은 대학교를 다닐 때였다. 대학생 때 총학생회에 가입했었고 학생회장까지 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던 것 같다. 학우들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 당시에는 돈에 대한 걱정도 많이 없었고 열정 하나만으로 살아갈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승일씨는 그때 처음으로 출마해서 당선되는 즐거움을 맛보았던 것 같고 대학 졸업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거의 목숨을 걸어야 했던 내부고발의 동기가 정치적 욕망은 전혀 아니었지만 최순실을 만나기 전부터 막연하게 갖고 있던 바람이었다.

 

 

승일씨는 외롭고 고독하다는 감정을 많이 느꼈을 것 같았는데 역시 2016년 10월의 상황이 빠질 수가 없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2016년 10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실직되었다. 고정적인 생계를 찾고자 하니 언론에 너무 많이 노출되었다. 노승일이라는 인물 자체가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회사들은 정권교체에 대한 변수 때문에 나를 채용하길 꺼려했다. 그런 부분 때문에 평범한 직장을 갖지는 못 했다. 그렇게 6년 정도를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빚은 쌓여만 갔다. 이자가 이자를 낳는 그런 삶이 내가 원했던 삶인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가족들한테도 많이 미안했다. 심지어 집에 쌀이 떨어진 적도 있다. 요즘 시대에 집에서 쌀이 떨어진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 한다. 물론 그런 분들이 없진 않겠지만 그게 내가 된다고는 그동안 생각치 못 했었다.

 

유명세는 양날의 검이었다. 대한민국과 국민들은 승일씨의 내부고발로 엄청난 공익적 성과를 맞이하게 됐지만 승일씨의 삶은 어느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았다. 전국민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됐지만 실익은커녕 오히려 마이너스만 됐다. 우리 조직에 들어와서 또 내부고발을 하면 어쩌지? 그런 편견으로 승일씨를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었다. 승일씨는 뭔가 숨통이 조여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지나온 승일씨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 같은 게 있을까? 승일씨는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를 이야기했다. 바로 채무 청산이다. 빚부터 다 갚고 보자는 것이다. 승일씨는 “일단 내 앞에 있는 채무를 하루 빨리 청산하는 것이 제일 큰 1차 목표”라고 강조했다.

 

일단 채무를 먼저 다 정리하고 싶다. 내가 일을 좀 많이 하더라도 채무를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다. 개인 회생과 파산 신청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나 지인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회생이나 파산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갚는 방법을 선택했다. 채무를 다 청산하고 나면 돈을 조금씩 모아서 조용히 선행을 실천하고 싶다. 이게 두 번째 목표다.

 

 

이제 개별 질문 타임이다. 승일씨에게 2016년 이후 6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정리해달라고 부탁하면서 구체적으로 광주로 내려오게 된 계기를 듣게 됐다.

 

국정농단 건으로 정말 검찰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이후 광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사실 나는 서울 토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나에게 서초동은 정말 트라우마가 있는 곳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나서도 한동안 검찰과 법원에 불려다녀야 했다. 그래서 서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서울은 나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워낙 노출도 많이 됐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2018년 즈음 광주로 내려왔다. 나는 연고가 없지만 아내가 연고가 조금 있다. 아내도 서울 출신이지만 외가 친척들이 광주에 거주하고 있다.

 

사실 빚이 많은 것은 요식업 창업이 잘 안 됐기 때문이다. 꼭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자영업자 10명 중 9명이 문을 닫을 정도로 험난하다. 그러나 코로나는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더더욱 가중시켰다.

 

문제는 2019년 말부터 코로나가 대유행했다. 그 당시 삼겹살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까 말한 것처럼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이후 닥치는 대로 일했다. 365일중에 360일은 일을 한 것 같다. 건설 현장에 가서 일을 하고 건설 노동이 없으면 인력센터에 가서 또 다른 일을 했다. (엄청 힘들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체중이 많이 빠져서 오히려 더 건강해진 느낌도 있다. 원래 97~98kg 정도 나갔었는데 일을 하고 나니 72~73kg 정도로 빠졌다.

 

 

다른 공익 제보자들이 미디어에 나올 때마다 승일씨는 어떤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는지 물었다. 승일씨는 안창용씨(국민재산되찾기 운동본부 사무국장)와 김영수씨(전 해군 소령)를 거론했다.

 

바로 떠오르는 인물은 안창용 국민재산되찾기 운동본부 사무국장이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훌륭한 공익 제보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분들이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공익 제보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수 있다. 공익 제보를 하면서 유명세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지 못 했다. 그분들을 만나보면 처음 공익 제보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본인의 가정이나 사회적 위치보다 이 나라의 궁극적인 사회 정의를 찾기 위해 그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였다. 이외에도 김영수 전 해군 소령이 떠오른다. 이 분은 1급 기밀이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승일씨는 웃으며 “그분들이 나에게 힘내라고 말씀해주셔야 한다. 그래도 그분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었다. 그분들은 나에게 격려를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승일씨는 내부고발을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사람에게 섣불리 뭐라고 조언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승일씨는 대한민국을 뒤흔든 엄청난 내부고발자였던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나도 내부고발을 했던 과거의 내 결정에 대해 시간이 좀 지나서 나름대로 정리를 해봤다. 내가 정리한 결론을 말하자면 이런 거다. 해봐라. 하지 마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건 온전히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이 부분밖에는 이야기를 못 하겠다. 왜냐하면 나는 고발 이후의 삶을 6년 동안 살았다. 내부고발자의 삶? 처음에는 메스컴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등 뭔가 영화에 나오는 정의로운 주인공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잠깐이다. 애초에 내부고발자들이 이런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이 좀 더 옳은 방향으로 개선되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할 뿐이다. 내부고발이라는 것이 결정하기도 힘들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이후의 삶도 힘들다.

 

승일씨는 내부고발자의 삶을 눈(snow)에 비유했다.

 

지금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지만 바닥에 쌓인 눈은 언젠가 녹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 눈이 왔었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부고발을 생각 중인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오로지 본인의 판단에 따라서 본인이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오롯이 본인이 감내해야 한다.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게끔 주변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절친 등 가까운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라 섣불리 해야 한다 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취지다.

 

 

승일씨의 페북에 보면 주먹을 쥐고 활짝 웃는 모습이 자주 올라온다. 스스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기 암시를 하기 위해 이런 사진들을 올리는 것일까? 승일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2016년 10월에 그 큰일을 세상에 밝히면서 불면증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내 발로 정신병원에 찾아가 진찰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주위에서는 이제 약을 끊으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때의 그 기억들이 밀려오면 나는 먹을 수밖에 없다.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 맞다. 주먹을 쥐고 활짝 웃는 것은 어쩌면 나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알고 있기는 했지만 계속 이야기를 들을수록 정말 우여곡절의 끝판왕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번 시련이 닥칠 때마다 뭔가 “신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그런데 승일씨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전했다. 승일씨는 신세를 한탄하기 보다 지금 내 눈 앞에 놓여 있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정말 지금까지 살면서 어떠한 시련이 닥쳤을 때 누구를 원망해본 적이 없다. 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나의 판단을 원망하거나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예를 들어서 지금 당장 채무가 많이 늘었으면 이 채무를 빨리 갚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이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게 된 것도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것보다 채무를 더 빨리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었다. 이번에 족발집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인테리어 사업 자체가 건설 쪽이기 때문에 경기를 정말 많이 탄다. 지금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족발집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배달만 거의 전문적으로 하는 족발집을 오픈할 생각이다.

 

 

그런데 삼겹살집이 망해서 빚이 상당했다고 했는데 인테리어 업체와 족발집 등은 어떻게 오픈할 수 있었을까? 밑천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열심히 살다 보니 정말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족발집을 차릴 때도 채무도 많고 돈도 없었는데 지인 한 분이 족발 한 번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평소 족발에 대해 정말 배우고 싶었다. 어떻게 만들면 이런 맛있는 족발이 만들어지는 걸까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답답함도 해소할 겸 족발에 대해 배우다 보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이 2000만원을 빌려줘서 가게 오픈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승일씨는 지금도 페북 대문에 “돈도 없고 빽도 없어도 정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해놨다. 승일씨는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민생당에서 공천을 받았다. 광주 광산을에서 실제로 출마까지 했는데 그때 당시의 각오와 소감에 대해 물었다.

 

떨어져도 한 번은 출마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당에서는 딱히 콜이 없었다. 그런데 무소속으로 나가자니 비용이 또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민생당에 입당해 선거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민생당은 지금 흐지부지해지고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 없어진 것 같지는 않다. 선거판은 뭔가 더럽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나는 네거티브를 하지 않았다. 이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자부할 수 있다.

 

 

승일씨에게 접근하는 검은 손들이 있었다. 선거 장사꾼들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있다.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표가 몇 만표라는 말을 하며 당선되는 데 도움을 줄 테니 돈을 달라는 사람이 서너 명 찾아왔었다. 그런데 돈이 어디 있겠는가? 선거 비용으로 쓴 돈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 줄 돈은 정말 땡전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돈이 없다고 말을 했다. 그러면 조용히 가면 그만인데 꼭 돈도 없는 XX가이러면서 육두문자를 날리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에 보면 반드시 신고하려고 한다.

 

낙선 이후 승일씨는 2021년 초까지 민생당에서 광주시당위원장 직무대행과 금융개혁특별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내 탈당했고 열린민주당에 입당했다. 그 뒤로는 열린민주당이 더불어민주당에 흡수됐다. 첫 선거 도전 이후의 삶에 대해 승일씨는 계속해서 지역구 출마 도전을 이어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민생당을 탈당하고 열린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린민주당 당원으로 있었는데 곧 열린민주당과 민주당이 합당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은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당시 나는 열린민주당 소속으로 (2024년 총선) 지역구 출마를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당과 합당이 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더 말해 무엇하랴. 승일씨는 망설임 없이 다음 총선에서 또 도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9년 광주에서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

 

계속 도전할 생각이다. 나는 도전의 아이콘이다. 비록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나는 정치를 할 것이다. 돈 없고 빽이 없어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청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끝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승일씨는 2019년 8월22일 22시 즈음 광산구 수완동에서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 승일씨는 당시 경찰의 음주 단속을 보고 차를 돌려 도주했고 1km 떨어진 곳에서 붙잡혀 경찰과 임의동행을 했다. 혈중알콜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0.046%였다. 승일씨는 윤창호법 체제 이후 음주운전을 범했고 스스로 페북으로 과오를 먼저 공개했지만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총선 출마를 감행했다. 제대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승일씨는 평범한미디어에 일말의 변명도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앞으로 음주운전을 범하지 않는 실천의 자세가 중요하다. 그래서 승일씨는 평범한미디어 기자들과 손가락을 걸고 다시는 음주운전을 하지 않고 철저히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을 때 내가 바로 직접 페이스북에서 음주운전 사실을 알리고 사과했다. 걸리자마자 그날 바로 올렸다. 잘못은 잘못이다. 거기에 대한 핑계는 대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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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안녕하세요.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입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냉철함과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겠습니다. 더불어 일상 속 불편함을 탐구하는 자세도 놓지치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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