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싶은 동기부여가 될 만큼만 읽다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면 그만 읽고 바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좋다.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기세가 무섭다. 개봉한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도 추억과 향수에 젖은 관객들의 감동 후기가 줄을 잇고 있다. MZ 세대들도 열광하고 있다. 그만큼 트렌드를 탔다. 15일 기준 관객수 290만명에 평균 평점이 9.28점이다. 국내에서 개봉한 일본 애니매이션 흥행 순위 역대 2위라고 한다. 무엇보다 원작을 집필한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가 연출과 각본까지 맡았다는 점이 기대감을 배로 높였다.
뜨거운 관심에 편승해서 어그로를 끌려는 사람도 있다. 김지학 소장(한국다양성연구소)은 관련 칼럼을 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김 소장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 말고 원작 <슬램덩크>에 대해 다분히 남성 중심적이라는 취지로 여성들의 캐릭터를 수동적으로 묘사했다고 지적했다. 누가 봐도 논리적 비약이 심했는데 크게 논란이 된 이후 김 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해명 글을 올렸다. 거기에 댓글을 단 A씨는 아래와 같이 꼬집었다.
그 칼럼이 현 시대에 유효하려면 최소한 이번 극장판을 보고 과거 TV 애니메이션판과 비교하면서 젠더박스를 논하거나 했어야지. 당신의 글은 현재 슬램덩크 흥행에 어그로를 끌려는 의도 밖에 느낄 수 없도록 불성실합니다.
이야기의 전개를 이끌어가는 주요 캐릭터들이 모두 남성이고, 여성 캐릭터들은 비중이 없거나 수동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성차별적이라는 주장은 너무나도 1차원적이고 유아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렇게 따지면 <무한도전>의 출연진들은 모두 남성들이기 때문에 여성 혐오적 예능 프로그램이다. 정주식 전 직썰 편집장도 “슬램덩크 젠더박스 비판 글은 마치 사극을 보면서 왕정을 규탄하는 사람의 비분강개 같다”고 일축했다.
다시 돌아와서. 일단 1992년생인 나도 <슬램덩크>를 재밌게 봤던 기억시 선하다. 동네 만화방에서 빌려 거의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원래 일본 만화가 참 재밌긴 한데 <슬램덩크>는 그중에서 끝판왕이다. 각종 명대사들은 아직까지도 인터넷 밈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등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독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근데 솔직히 극장판 개봉 소식을 접한지 오래됐지만 딱히 볼 마음이 없었다. 거의 다 아는 내용이고 요즘 영화 값도 너무 비싸기 때문에 굳이?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 소장의 어그로를 접하고 그냥 보기로 했다. 한국어 더빙판을 봤다.
무엇보다 새롭게 바뀐 작화가 눈에 띄었다. 2023년 버전에 맞춰 그래픽을 새로 넣은 작화였다.
줄거리의 기본 얼개는 북산고와 산왕공고 두 고교 농구팀의 치열한 시합이고, 거기에 북산고 5인방(강백호/서태웅/채치수/정대만/송태섭)의 과거 스토리가 더해졌다. 과거 파트에서는 송태섭(엄상현 성우)의 비중이 높은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새롭게 추가된 분량이다. 원작은 강백호 위주로 전개된다.
특히 연출이 기가 막혔다. 만약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향수 마케팅에만 의존했다면 흥행하지 못 했을 것이다. 북산고와 산왕공고의 대결을 박진감 넘치게 연출한 부분이 컸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시합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봐도 손에 땀을 쥐게 될 정도로 막상막하의 분위기가 킬링 포인트였다. 결국 북산고가 승리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말 산왕공고가 이길줄 알았다.
사운드와 OST도 참 좋다. 강렬한 락 음악의 OST는 극 전개를 위한 효과로 딱이었다. 등장인물들이 달려나가고 플레이를 할 때마다 다르게 깔리는 사운드가 정말 리얼했다. 최고조에 다다른 몰입감을 느껴볼 수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가 너무 비중이 높아서 다른 북산고 선수들의 사연 소개가 생략됐다는 점이다. 강백호를 농구의 세계로 이끌어준 채치수의 여동생 채소연은 너무 비중이 없다. 이 대목은 원작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조금 의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처음 보더라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원작을 찾아보는 신규 유입 팬이 될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원작을 본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안 본 사람들에게는 입덕의 관문이 될 수 있다.
영화를 다 본 뒤에 한편으로는 일본의 체육 인프라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학교 체육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슬램덩크와 같은 스토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전문 프로선수를 키우는 엘리트 체육 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도 열정적으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인프라와 제도가 탄탄하게 구축돼 있는 것이다. 꼭 프로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은 땀과 열정을 바쳐서 스포츠에 빠져보는 경험을 해볼 수가 있다. 그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로도 평생 가는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일상 속 운동 습관을 형성해주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뜬금없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고 이런 학원 체육의 제도 문제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조현재 이사장은 재작년 연말 한 포럼에 참석해서 아래와 같이 강조했다.
미국, 일본, 캐나다, 러시아 등은 전체 학생의 50%가 학교에서 주 3회 이상 체육 활동에 참여한다. 우리나라는 이 비율이 20% 미만이다. 전체 학생의 14%가 학교 밖에선 전혀 운동을 하지 않는데 이는 OECD 평균의 2배다. 문체부, 대한체육회와 긴밀히 협의해 학생들이 마음껏 학교에서 스포츠로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