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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운동의 역사 "감옥 같은 방직공장에서 정동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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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전남방직 여성 노동자 항쟁에 주목한 연구 세미나 발표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故 전태일 노동운동가가 “인간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달라 호소하며 목숨을 내던진지 벌써 50년이나 흘렀다. 대한민국의 노동 환경은 그 당시보다 1나노미터 만큼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언론에서는 저마다 대한민국이 각종 지표상 세계 선진국이자 10위권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 정신적 자위를 한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 노동 환경과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은 개발도상국 수준이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경우 “노동자로서 받는 핍박과 여성으로서 받는 핍박”이라는 이중고를 겪는다.

 

과거 광주에서 가장 큰 방직공장 중 하나였던 전방(전남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투쟁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독립기획자 최하얀는 10월30일 오후 2시 광주시민회관에서 개최된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세미나에 참석해서 “이 연구사업은 박효선 작가의 딸들아 일어나라로부터 시작한다”고 운을 뗐다.

 

이어 “노동이 공장이었을 때가 있었다. 공장의 쉬지 않는 기계들의 틈 사이에서 인간의 노동이 거기에 맞추어지기 위해서 신체는 기계의 리듬과 온도에 자기를 끼워 맞춰야 했다”며 “전남방직에 투입되어 노동항쟁에 기여했던 김경희씨는 인터뷰에서 방직공장을 감옥에 비유했고 일이 끝나면 완전히 기진맥진했다고 표현했다”고 전했다.

 

최씨는 김씨가 “노곤해진 몸의 피로를 풀고 생체적 리듬을 되살리기 위해 목욕탕 월권을 끊어 다녀야만 했다”며 “노동을 하다 보니 다른 노동자들도 걸음을 갈지자(之)로 걷게 되었고, 그들의 기진맥진한 몸에서 저항의 에너지가 나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씨의 말처럼 당시 노동 환경에서 여성 노동자는 그저 수많은 부품들 중 일부였다. 공장의 기계들이 노동자에게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공장과 기계에 자신의 몸을 끼워맞춰야 했다.

 

이처럼 고된 노동으로 인해 에너지가 바닥나 있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들은 이를 악물고 ‘전남방직 여성 노동자 항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 사건을 배경으로 앞서 말했던 “딸들아 일어나라”라는 연극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항쟁을 주도한 사람들이 모여 1990년 광주여성노동자회가 만들어졌다. 이는 “1980년대 말 광주 여성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크게 빛을 발한 사건”이었다.

 

최씨는 “연구를 위해 기사를 찾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이 사건을 역사의 일부분으로 만들기보다 재구성해야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노동자들과 노조간 연대가 옅어지고 여성의 일상적 저항이 고립되어 가는 지금 시점에서 이 운동을 재구성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현재의 우리가 지금의 시점에서 이 항쟁을 재구성할 때에만 이 항쟁은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당시에는 어떤 가슴 아픈 일이 있었을까?

 

연구자들의 설명을 토대로 간략히 정리해보자. 격동의 1960~70년대 산업구조는 경공업 위주였다. 그 당시 여성 노동자의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하면 단체로 다 같이 한 공간에 앉아서 미싱기를 돌리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여성 노동자들은 정말 중요한 경제 주체이자 산업 역군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자로서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 했고 ‘공순이’라는 멸칭을 듣고 비하적인 시선을 받아가며 일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인데 여성 노동자들은 범죄자가 아니고 그저 묵묵히 성실히 살아가는 이 땅의 시민들이다. 이들은 공장을 다니면서도 밤에는 야학에 가서 졸린 눈을 비비며 열심히 공부를 하기도 했다. 공장 노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주경야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깔보는 시선보다 노동자들을 더 괴롭힌 것은 살인적인 노동 환경이었다. 일단 노동 강도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저임금 장시간은 기본이고 심하면 관리자로부터 반말과 욕설도 들어야 했다. 특히 기숙사가 있는 공장들은 사실상 24시간 감시당한다고 보면 된다.

 

 

사실상 노동운동이라기보다 생존 투쟁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난 1970년을 기점으로 섬유노조회관이 준공되고(1976), 국제방직사건(1978), YH무역사건(1979) 등이 뒤를 잇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광주지역 노동운동 또한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79년 호남전기 노동운동이 있다. 호남전기에서는 1979년부터 노조활동이 본격화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정부의 반노동 기조는 여전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 시기에 노동 투쟁은 신군부 정권에 대한 정치적 투쟁의 성격까지 갖게 되었고 마침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는 경공업 중심 노동자 뿐 아니라 중공업 노동자들에까지 번진 전국적인 노동운동이 일어났다.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로 신규 노동조합과 노동쟁의가 다수 발생했고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전남방직 여성 노동항쟁 또한 노동자 대투쟁 분위기를 타고 이뤄졌다. 당시에는 ‘어용 노조’가 많았다. 전방 노동자들은 이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1989년 4월25일 정덕여씨와 최경희씨가 노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5월16일에 전방 여성 노동자 부당 해고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사측의 사주를 받은 조장과 대지장들이 기숙사로 몰려와 최경희씨를 차에 실어 강제 귀가시켰고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내리는 엽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사측은 3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에게 해고 및 출근 정지 처분을 내린다. 이런 부당한 처사에 저항하는 대의원과 조합원 7명이 집단으로 구타당했다. 이들은 지하실에 감금되어 고문에 준하는 폭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지만 이 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 이후 이들은 △부당 해고자 △복직 노조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며 △출근투쟁 △신기하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 농성 △가두 시위 등을 진행했다. 이 사건이 바로 전방 여성 노동자 항쟁이다. 이후 전방에 의해 해고된 여성 활동가와 노동자 등 30명이 ‘광주여성노동자회’를 창립했다.

 

 

최씨는 “기술의 역학과 여공의 정동(황지영)”이라는 논문을 인용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말하는 정동이란 “희노애락과 같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일어나는 감정”을 뜻한다.

 

최씨가 정리한 4가지 정동은 △수치심 △슬픔 △사랑 △분노 등이었고 이것들이 노동항쟁의 주체를 노동운동가나 노동자 1명을 넘어서 셀 수 없는 복수의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움직임으로 만들게 했다고 설파했다.

 

정동들은 저항의 매개체였다. 노동운동가들은 정동들을 조직하고 돌보는 역할을 했다. 노동운동가가 여성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계몽시키는 구조가 아닌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저항의 정동들이 발생했다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면 ‘노동운동’이 희미해진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그 이후를 말해야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틀거리이기 때문이다.

 

저항의 정동론은 현재 사회·노동·인권·환경활동가들이 되새겨 봐야 할 메시지다. 간혹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은 아직도 대중을 계몽시켜야 하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정말 건방진 태도다. 이러한 시각 때문에 진보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비호감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고 탈진보 보수화로의 급행열차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민들이 뭘 모르고 있으니 계몽시켜야 겠다고 떠들 게 아니라 故 노회찬 의원처럼 낮은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격의없이 어울리면서 앞서 말한 정동을 진정성 있게 나누는 태도가 필요하다.

 

최씨는 “동시대의 저항은 이제 여성의 일상적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념의 공유 때문만은 아니었다”며 “그보다는 도리어 그들 사이의 저항의 정동을 발굴하고 생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지금 페미니즘 여성운동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전방여성노동자항쟁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들 여성 노동자들은 끝났다고 했지만 아직은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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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안녕하세요.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입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냉철함과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겠습니다. 더불어 일상 속 불편함을 탐구하는 자세도 놓지치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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